[허원순 칼럼] 노동자 파업 vs 자본가 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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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발되는 한국형 불법 파업
언제까지 노조의 전유물 될까
자본가 태업·파업 재촉하는
퇴행 노조, 교조 정치, 구태 행정
자본·투자 달아나면 일자리도 소멸
자본 파업은 자신도 모르게 진행
칠레 아옌데정권 전철 피할수 있나
허원순 논설위원
언제까지 노조의 전유물 될까
자본가 태업·파업 재촉하는
퇴행 노조, 교조 정치, 구태 행정
자본·투자 달아나면 일자리도 소멸
자본 파업은 자신도 모르게 진행
칠레 아옌데정권 전철 피할수 있나
허원순 논설위원
대우조선해양 하청노조의 불법점거 파업이 또 한 번의 미봉책으로 마무리됐다. 꼬리 끝이 몸체를 뒤흔든 이번 사태로 노동조합 세력은 파업의 힘을 거듭 체감했을지 모른다. 파업의 가시적 효과로 치면 화물연대가 더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는 집단 운송거부였지만, 그들은 총파업이라고 외쳤다. 정부와 정치권, 다수 언론도 이들의 노동자·파업 프레임에 갇혀 끌려갔다. 화물연대를 끌어들인 민주노총의 문어발식 세 확장도 성공이라면 성공이다. 불법을 마다하지 않는 한국형 만성 파업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대가는 갈수록 커진다. 최근 10년간 2배 늘어난 파업이 GDP를 연평균 10조원씩 깎아먹었다. 이 기간 근로 손실 피해는 일본의 193배에 달한다.
새 정부 출범을 겨냥한 듯한 대형 파업들을 보면 한국은 좀체 변하지 않은 사회다. 교조적 정치, 구태 행정보다 반기업적 노조세력들의 퇴행성이 특히 변하지 않는다. 많은 국민이 외면하는 데도 그렇다. 북유럽 ‘스마트 좌파’나 중국공산당의 변신을 못 보는지 의아스럽다. 최후의 자구적 단결권이라면서도 남발을 해대는 파업이 언제까지 유효할까. 수시로 내휘두르는 칼은 무섭지 않게 된다.
파업이 영원히 노조의 전유물이라고 여긴다면 유아적 사고다. 자본가도 태업을 넘어 파업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노조에는 없어 보인다. 사실 노동자 파업은 단선적이다. 과장된 주먹질에 생채기나 내는 자해 성격도 강하다. 반면 자본가 파업은 소리 없이 진행된다. 노조처럼 ‘우리를 파업으로 내몬다’고 고함치기는커녕 파업이 아니라고 부인할 것이다. 조용하게, 슬그머니 달아날 것이다. 그 결과는 솜뭉치 속 철퇴처럼 우리 경제에 충격파를 던질 것이다. 불법점거 대신 합법적으로 사업장을 버릴 것이다. 자본가 파업이 무서운 것은 당사자조차 태업과 파업에 대한 의식을 못 하는 와중에 진행된다는 점이다. 대기업이든 골목길의 생계형 투자든 마찬가지다. 투자의 속성이다.
자본가 파업의 실례로 흔히 과거 칠레를 얘기한다. 1970년대 ‘캐비어 좌파’로 다분히 낭만적 이상주의를 추구했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은 급진적 좌경화로 기업 반발을 샀다. 섣부른 국유화, 반미 정책, 친노조 행보가 투자 위축, 자본 유출을 재촉했다. ‘자본가 파업’이라고 나라 밖에서도 주시하던 이때 칠레 경제가 어떻게 추락했나. 정권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핑크 타이드(연성 좌파 정권의 연쇄 집권)’가 일곤 하는 남미에서는 별난 현상도 아니다.
농성 노조와 달리 파업 자본가는 갈 곳도 많다. 세금 감면에 온갖 혜택 줄 테니 사업하러 오라는 나라가 많다. 2000년부터 21년간 순유출 국내 자본은 403조원에 달한다. 물론 글로벌 경영, 사업장 다각화, 시장 다변화 전략에 따른 ‘투자 엑소더스’다. 이 돈을 국내 자본의 파업이라고 한다면 비약이다. 하지만 기업의 재원 재배치와 투자국 다변화, 즉 자본의 이동은 그만큼 일상적이고 대규모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중국까지 감세와 규제 철폐로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국가 간 이런 경쟁은 자본의 이동에 가속도를 내게 한다. 좋은 인재는 어디에나 넘치고, 기업은 국적도 바꿀 수 있는 현실에 무심하다면 노조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노동의 종말’보다 ‘노조의 종말’이 더 빨라질지 모른다.
자본가 파업을 재촉하는 게 노조만이 아니다. 때로는 법과 제도가 더 부추긴다. 문제의 중대재해처벌법을 비롯해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상정한 규제법, 관존민비·사농공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삼류 행정이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깊은 흐름과 무서운 개연성에 대해선 청맹과니라는 점에서는 정부·국회도 노조와 다를 바 없다.
자본가 파업이 대기업, 재벌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퇴직금이나 집 담보로 몇억원을 빚낸 자영업자들도 몇 명 직원과의 관계에선 자본가가 된다. 이들이 커피집을 닫아버리고, 식당 개업 계획을 접는 것도 결국은 파업이다. 급등한 최저임금 때문이든, 매사 갑을 관점에서 사업주를 옥죄는 규제 탓이든, 본질에선 기업이 국내 투자를 접는 것과 같다. 자본을 태업·파업으로 내몰 게 아니라 한껏 움직이게 해야 한다. 투자가 없으면 고용도 없고, 일자리가 없으면 파업권도 쓸모없다. 이 사실만은 앞으로도 변함없다.
새 정부 출범을 겨냥한 듯한 대형 파업들을 보면 한국은 좀체 변하지 않은 사회다. 교조적 정치, 구태 행정보다 반기업적 노조세력들의 퇴행성이 특히 변하지 않는다. 많은 국민이 외면하는 데도 그렇다. 북유럽 ‘스마트 좌파’나 중국공산당의 변신을 못 보는지 의아스럽다. 최후의 자구적 단결권이라면서도 남발을 해대는 파업이 언제까지 유효할까. 수시로 내휘두르는 칼은 무섭지 않게 된다.
파업이 영원히 노조의 전유물이라고 여긴다면 유아적 사고다. 자본가도 태업을 넘어 파업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노조에는 없어 보인다. 사실 노동자 파업은 단선적이다. 과장된 주먹질에 생채기나 내는 자해 성격도 강하다. 반면 자본가 파업은 소리 없이 진행된다. 노조처럼 ‘우리를 파업으로 내몬다’고 고함치기는커녕 파업이 아니라고 부인할 것이다. 조용하게, 슬그머니 달아날 것이다. 그 결과는 솜뭉치 속 철퇴처럼 우리 경제에 충격파를 던질 것이다. 불법점거 대신 합법적으로 사업장을 버릴 것이다. 자본가 파업이 무서운 것은 당사자조차 태업과 파업에 대한 의식을 못 하는 와중에 진행된다는 점이다. 대기업이든 골목길의 생계형 투자든 마찬가지다. 투자의 속성이다.
자본가 파업의 실례로 흔히 과거 칠레를 얘기한다. 1970년대 ‘캐비어 좌파’로 다분히 낭만적 이상주의를 추구했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은 급진적 좌경화로 기업 반발을 샀다. 섣부른 국유화, 반미 정책, 친노조 행보가 투자 위축, 자본 유출을 재촉했다. ‘자본가 파업’이라고 나라 밖에서도 주시하던 이때 칠레 경제가 어떻게 추락했나. 정권의 몰락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런 일이 ‘핑크 타이드(연성 좌파 정권의 연쇄 집권)’가 일곤 하는 남미에서는 별난 현상도 아니다.
농성 노조와 달리 파업 자본가는 갈 곳도 많다. 세금 감면에 온갖 혜택 줄 테니 사업하러 오라는 나라가 많다. 2000년부터 21년간 순유출 국내 자본은 403조원에 달한다. 물론 글로벌 경영, 사업장 다각화, 시장 다변화 전략에 따른 ‘투자 엑소더스’다. 이 돈을 국내 자본의 파업이라고 한다면 비약이다. 하지만 기업의 재원 재배치와 투자국 다변화, 즉 자본의 이동은 그만큼 일상적이고 대규모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 중국까지 감세와 규제 철폐로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다. 국가 간 이런 경쟁은 자본의 이동에 가속도를 내게 한다. 좋은 인재는 어디에나 넘치고, 기업은 국적도 바꿀 수 있는 현실에 무심하다면 노조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노동의 종말’보다 ‘노조의 종말’이 더 빨라질지 모른다.
자본가 파업을 재촉하는 게 노조만이 아니다. 때로는 법과 제도가 더 부추긴다. 문제의 중대재해처벌법을 비롯해 기업인을 잠재적 범죄인으로 상정한 규제법, 관존민비·사농공상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삼류 행정이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 이면의 깊은 흐름과 무서운 개연성에 대해선 청맹과니라는 점에서는 정부·국회도 노조와 다를 바 없다.
자본가 파업이 대기업, 재벌만의 일이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퇴직금이나 집 담보로 몇억원을 빚낸 자영업자들도 몇 명 직원과의 관계에선 자본가가 된다. 이들이 커피집을 닫아버리고, 식당 개업 계획을 접는 것도 결국은 파업이다. 급등한 최저임금 때문이든, 매사 갑을 관점에서 사업주를 옥죄는 규제 탓이든, 본질에선 기업이 국내 투자를 접는 것과 같다. 자본을 태업·파업으로 내몰 게 아니라 한껏 움직이게 해야 한다. 투자가 없으면 고용도 없고, 일자리가 없으면 파업권도 쓸모없다. 이 사실만은 앞으로도 변함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