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동안 몰랐다…'로마 조각상' 놀라운 진실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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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두 조각상이 있습니다. 왼쪽은 바티칸박물관에 소장 중인 ‘프리마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상’입니다. 서기 20년경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를 조각한 이 작품은 로마 미술의 손꼽히는 걸작입니다. 근사한 개선장군의 옷을 차려입고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제국의 영광을 선포하는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이 위엄 넘치네요.
그럼 이제 시선을 강탈하는 오른쪽 조각을 얘기해 볼까요. 왼쪽 조각에 색을 입혔을 뿐인데 영 시원찮네요.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물감을 칠한 것 같기도 하고, 망해가는 놀이공원에서 색이 벗겨져 가는 싸구려 조형물 같기도 하고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파비오 배리가 남긴 코멘트가 걸작입니다. “너무 촌스러운데요. 여장남자가 택시를 잡으려는 모습처럼 보여요(like a cross-dresser trying to hail a taxi).”
사실 2000년 전 이 조각상이 만들어졌을 당시, 실제 조각상은 왼쪽보다 오른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순백의 대리석 조각이었던 줄 알았던 작품이 사실 ‘풀 컬러’였다는 거죠. 다른 대부분의 그리스·로마 조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들어졌을 당시엔 알록달록하게 채색돼 있었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왜 그리스·로마 조각이 무조건 희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깜짝 놀란 브링크만은 특수 조명으로 다른 조각상들을 비춰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죠. 대부분의 조각상에 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더 놀라운 건, 그에겐 이제 조명 없이 맨눈으로도 색칠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브링크만이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저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이 사라졌을 뿐인데, 모든 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브링크만은 조각들의 색 연구를 계속하다가 1990년대 들어 고고학자인 아내와 함께 그리스·로마 조각들의 원래 색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저 백설공주 의상을 입은 것 같은 아우구스투스상은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누가 봐도 결과물이 보기 좋지는 않지요. 실제 색칠돼있던 모습은 분명히 저것보다 훨씬 진짜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조각상의 색을 복원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합니다. 남아있는 물감 흔적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또 당시 화가들이 대리석에 색을 칠할 때 쓰던 재료나 기술에 대한 정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조각상의 일부를 떼어내서 검사해볼수도 없었죠. 그래도 브링크만 부부는 X선을 비롯한 갖은 수단을 동원해 원래 색을 추적했습니다. 도구와 재료도 당시 사용했을 법한 것만 골라 썼죠. 부부는 2003년부터 복원을 마친 조각상들을 모아 ‘Gods in Color’라는 순회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국내엔 온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 28개 도시에서 300만명의 관람객들이 전시를 봤습니다. 색이 유치하다는 등 비판도 많이 받긴 했습니다만, 이들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어 지금은 많은 미술사 교과서가 ‘컬러풀한 조각상’을 정설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채도 : 색이 있는 고대 조각상’(Chroma: Ancient Sculpture in Color) 전시도 이런 전시의 일환입니다. 지난 5일 개막했고, 내년 3월 26일까지 이어집니다.
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리석 산지인 이탈리아의 카라라까지 가서 흰 대리석을 직접 사오기도 했죠. '피에타'를 비롯한 그의 걸작들은 이런 오해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얀 대리석이 몸의 형태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아무래도 색이 있으면 조각의 세부적인 형태에는 눈이 덜 가게 되죠.
문제는 이런 편견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는 겁니다. 발굴 기술이 발전한 18~19세기, 그리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 색이 있는 조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말까지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졌고요.
조각에 색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나는 원래부터 그리스·로마 조각상에 색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기 이 가슴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과 그 흰색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 사례’라는 편견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버렸던 겁니다. 근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흰 것일수록 아름답다”고 한 게 대표적입니다. 괴테는 “야만인이나 무식한 사람, 어린이들은 선명한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조각상에 물감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가 되면 이들은 “그리스가 등장하기 전 다른 문명의 유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사라 본드 교수는 “당시 학자들은 그리스·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미술이 이집트 등 다른 문화권의 미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흰색 조각상을 그 증거로 여겼다”며 “인종차별적인 인식이 눈을 가린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다채로운 색은 건강과 지성, 성실성 등 긍정적인 요소를 상징했습니다. 현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로마인들은 마냥 흰 피부보다는 햇빛에 그을린 갈색 피부를 선호했죠.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노인에서 젊은이로 바꿀 때 나오는 대목이 이런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피부는 다시 검게 변했고, 턱수염은 푸른색으로 돌아왔다”고요.
반대로 당시 사람들에게 흰색은 죽은 자가 있는 지하세계를 상징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숀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요즘 그리스·로마 조각상들을 본다면, 자신들이 '귀신의 집'에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그럼 이제 시선을 강탈하는 오른쪽 조각을 얘기해 볼까요. 왼쪽 조각에 색을 입혔을 뿐인데 영 시원찮네요. 초등학생이 장난으로 물감을 칠한 것 같기도 하고, 망해가는 놀이공원에서 색이 벗겨져 가는 싸구려 조형물 같기도 하고요.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인 파비오 배리가 남긴 코멘트가 걸작입니다. “너무 촌스러운데요. 여장남자가 택시를 잡으려는 모습처럼 보여요(like a cross-dresser trying to hail a taxi).”
사실 2000년 전 이 조각상이 만들어졌을 당시, 실제 조각상은 왼쪽보다 오른쪽에 가까운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순백의 대리석 조각이었던 줄 알았던 작품이 사실 ‘풀 컬러’였다는 거죠. 다른 대부분의 그리스·로마 조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들어졌을 당시엔 알록달록하게 채색돼 있었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우리는 왜 그리스·로마 조각이 무조건 희다는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요?
맨눈으로도 보이는 색칠 자국인데…
이야기는 198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독일 뮌헨대학교 고고학과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던 빈첸츠 브링크만은 그리스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한 도구들을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물체에 자외선을 비춰 표면의 상태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는 특수 기구를 만들었지요. 그런데 조명을 비추자 다양한 색을 칠한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됐습니다.깜짝 놀란 브링크만은 특수 조명으로 다른 조각상들을 비춰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죠. 대부분의 조각상에 색을 칠한 흔적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더 놀라운 건, 그에겐 이제 조명 없이 맨눈으로도 색칠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브링크만이 갑자기 초능력을 얻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저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이 사라졌을 뿐인데, 모든 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브링크만은 조각들의 색 연구를 계속하다가 1990년대 들어 고고학자인 아내와 함께 그리스·로마 조각들의 원래 색을 복원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저 백설공주 의상을 입은 것 같은 아우구스투스상은 그 결과물 중 하나입니다. 누가 봐도 결과물이 보기 좋지는 않지요. 실제 색칠돼있던 모습은 분명히 저것보다 훨씬 진짜처럼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조각상의 색을 복원하는 게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도 감안해야 합니다. 남아있는 물감 흔적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또 당시 화가들이 대리석에 색을 칠할 때 쓰던 재료나 기술에 대한 정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조각상의 일부를 떼어내서 검사해볼수도 없었죠. 그래도 브링크만 부부는 X선을 비롯한 갖은 수단을 동원해 원래 색을 추적했습니다. 도구와 재료도 당시 사용했을 법한 것만 골라 썼죠. 부부는 2003년부터 복원을 마친 조각상들을 모아 ‘Gods in Color’라는 순회 전시를 시작했습니다. 국내엔 온 적이 없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 28개 도시에서 300만명의 관람객들이 전시를 봤습니다. 색이 유치하다는 등 비판도 많이 받긴 했습니다만, 이들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어 지금은 많은 미술사 교과서가 ‘컬러풀한 조각상’을 정설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채도 : 색이 있는 고대 조각상’(Chroma: Ancient Sculpture in Color) 전시도 이런 전시의 일환입니다. 지난 5일 개막했고, 내년 3월 26일까지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몰랐을까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리스·로마 조각상이 흰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이런 오해는 사실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리스·로마 조각상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건 르네상스 시대. 처음 만들어졌을 때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었던 조각상들은 1000년 넘는 시간을 견디며 색을 잃었습니다. 그나마 색이 남아있던 조각상들도 발굴 과정에서 빛과 공기에 노출됐고, 흙을 털어내는 청소 과정까지 거치면서 금세 물감이 벗겨져 버렸죠. 결정적인 사건은 1489년 벌어졌습니다. 로마시대 대리석 조각인 ‘아폴로 벨베데레’가 로마에서 발굴돼 바티칸 ‘벨베데레의 정원’에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온 유럽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조각상을 보러 몰려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색이 다 벗겨진 흰색 조각이었죠. 모인 사람들은 조각상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이렇게 멋지고 근본 있는 그리스·로마 조각상들이 모두 흰색이니, 우리가 만드는 조각도 근본이 있어 보이려면 무조건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야겠구나.”르네상스 최고의 조각가인 미켈란젤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리석 산지인 이탈리아의 카라라까지 가서 흰 대리석을 직접 사오기도 했죠. '피에타'를 비롯한 그의 걸작들은 이런 오해 덕분에 더욱 아름다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얀 대리석이 몸의 형태와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아무래도 색이 있으면 조각의 세부적인 형태에는 눈이 덜 가게 되죠.
문제는 이런 편견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너무 깊이 박혀버렸다는 겁니다. 발굴 기술이 발전한 18~19세기, 그리스 아테네를 비롯한 여러 유적지에서 색이 있는 조각품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0세기 말까지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졌고요.
조각에 색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죠.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며 “나는 원래부터 그리스·로마 조각상에 색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기 이 가슴으로 느낀다”고 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조각과 그 흰색은 완벽한 아름다움의 모범 사례’라는 편견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박혀버렸던 겁니다. 근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친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이 “흰 것일수록 아름답다”고 한 게 대표적입니다. 괴테는 “야만인이나 무식한 사람, 어린이들은 선명한 색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조각상에 물감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 빼도 박도 못할 정도가 되면 이들은 “그리스가 등장하기 전 다른 문명의 유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아이오와대학의 사라 본드 교수는 “당시 학자들은 그리스·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미술이 이집트 등 다른 문화권의 미술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흰색 조각상을 그 증거로 여겼다”며 “인종차별적인 인식이 눈을 가린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다채로운 색은 건강과 지성, 성실성 등 긍정적인 요소를 상징했습니다. 현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로마인들은 마냥 흰 피부보다는 햇빛에 그을린 갈색 피부를 선호했죠.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노인에서 젊은이로 바꿀 때 나오는 대목이 이런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그의 피부는 다시 검게 변했고, 턱수염은 푸른색으로 돌아왔다”고요.
반대로 당시 사람들에게 흰색은 죽은 자가 있는 지하세계를 상징했습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큐레이터인 숀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요즘 그리스·로마 조각상들을 본다면, 자신들이 '귀신의 집'에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