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 ‘그 겨울, 손탁 호텔에서’는 한국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외국 여성 배우의 일기라는 형식을 띤다. ‘한국의 알 파치노’라는 스타 배우 이인기의 안하무인 같은 태도에 촬영장 분위기는 엉망이 되는데, 어느 날 그가 죽은 채 발견된다. 한창 이슈이던 영화계 성범죄 가해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던 상황이라 경찰은 그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내린다. 하지만 이 외국 배우의 일기는 범인이 따로 있음을 시사한다. 범인이 누군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나고, 독자는 숨은 단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가상의 일기(소설)를 반복해서 읽게 된다.
다른 단편도 사건 전말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는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에서 강우혁이 침묵으로 남긴 사연, 그리고 ‘피’의 의미를 독자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범인의 정체와 범행에 쓰인 트릭이 밝혀지는 ‘성호 삼촌의 범죄’에서도 성호 삼촌을 결정적으로 화나게 한 정상만의 말 한마디는 끝내 알지 못한다. “나는 그가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모른다. 삼촌은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아무리 보채도 내가 들을 수 있는 대답은 똑같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 어떤 여자도 들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고.”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한국적인 SF를 추구해온 듀나는 미스터리 소설집에서도 한국 사회의 여러 이슈를 녹였다. ‘그건 너의 피였어’는 어린 시절 학교 폭력 피해자였던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콩알이를 지켜라!’는 마스크를 쓰며 살아가는 코로나19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사회적 현안을 담는 데 너무 신경 쓴 탓인지 미스터리 소설 본연의 흡입력과 매력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독창성과도 거리가 있다. 작가는 미스터리 거장들의 소설에서 여러 장치를 빌려와 자신의 스타일로 변주한다. 이에 대해 듀나는 ‘작가의 말’에서 “여전히 저는 진지한 미스터리 작가가 아닙니다”라며 “제가 애거사 크리스티, 존 딕슨 카, 엘러리 퀸, 대실 해밋, 헨리 슬래서, 해리 케멜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살았던 곳에서 잠시 피크닉을 즐겼다고 해서 그렇게 구박받을 일일까요?”라고 한다. 이처럼 이번 소설집은 정통 미스터리가 아니라 ‘듀나 표 미스터리’다. 전작들을 즐겨 읽은 듀나 팬이라면 읽어볼 만하겠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