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전에다 일격을 가했다."

주어와 대상이 각각 누구일까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36세)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79세)의 면전에다 일격을 가했다고들 하네요. 3일(현지시간) 미국 현지에서 나온 반응입니다.

이날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산유국의 협의체인 OPEC+는 정례회의에서 9월 원유를 현재보다 소폭만 증산하기로 했습니다. OPEC과 OPEC+는 협의체이긴 하지만, '최대 오일 부국'인 사우디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사우디의 결정이나 다름없는 셈이죠.

OPEC+가 합의한 다음달 증산 규모는 하루 평균 10만 배럴입니다. 세계 원유 수요량의 0.1% 수준에 불과합니다. 시장에서는 9월 증산량이 OPEC+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적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1년간 월 증산량을 하루 평균 40만 배럴 이상씩으로 설정해왔거든요. 7~8월에는 64만8000배럴까지 늘렸었습니다.

사우디의 '찔끔 증산' 소식은 서방 국가들엔 실망스러울 수밖엔 없습니다. 올 들어 국제 유가가 상승세를 보여왔기 때문이죠. 코로나19 회복세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데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공급난까지 더해진 결과입니다. 지금은 배럴당 90달러선(3일 종가 기준 9월물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배럴당 90.66달러)으로 내려앉았지만, 6월만 해도 "조만간 배럴당 150달러 시대가 온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이럴 때 사우디와 OPEC+이 공급량을 대폭 늘려줘야 유가를 안정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 잇따랐습니다.


그런데 서방 국가 정상들 중에서도 왜 유독 바이든 대통령이 일격을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까요?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사우디를 방문해 빈 살만 왕세자를 만났습니다. 취임 1년 6개월여만이었습니다. 미 백악관은 공식적으로 "증산 얘기를 주고받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모양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기름 좀 많이 공급해달라"는 분위기를 폴폴 풍겼죠. 대놓고 말을 못한 건 바이든 대통령의 과거 행적 때문입니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 "빈 살만 왕세자가 워싱턴포스트 기자 암살 사건의 배후에 있다"며 왕세자의 인권의식을 비난했습니다. 사우디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겠다고까지 했었죠. 사우디가 미국의 오랜 우방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통령이 취임한지 1년이 넘도록 서로 왕래조차 하지 않은 배경입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달 돌연 사우디행을 택했습니다. 미국 휘발유값이 사상 최고치(6월 갤런당 5.02달러)를 찍으면서 "기름값 때문에 못 살겠다"는 국내 여론을 의식한 행보였습니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향한 정치권의 압박도 엄청났을 겁니다. '기름값을 해결해 서민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특명을 가슴에 안고, 중동 순방 일정에 사우디를 슬그머니 끼워 넣었습니다. 화해하자는 제스쳐죠.

'반(反)인권 문제로 사우디를 압박할 때는 언제고 인권 문제에 별다른 진전이 없는데도 갑자기 친한 척 하는 것이냐'는 인권단체들의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사우디 측에서는 "애인(사우디)을 걷어차 놓고 다시 매달리는 사람(미국) 같다"는 비아냥 섞인 볼멘 소리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에게 돌아온 선물은 OPEC+의 찔끔 증산 소식이네요. CNN은 "백악관 관계자들은 내심 사우디가 증산량을 늘리는 데 동참해줄 것이라고 낙관했었다"며 "빈 살만 왕세자와 지금부터라도 잘 지내보려는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적 도박의 첫발은 실패로 끝났다"고 분석했습니다.

하필 공교롭게도 전날 바이든 행정부는 사우디 등에 50억달러(약 6조5000억원) 규모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을 판매하는 방안을 승인했습니다. 이는 사우디의 숙원 중 하나였죠. '숙적' 이란과 맞붙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우디는 예맨 내전에서 이란이 지원하는 후티족 반군의 로켓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빈 살만 왕세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미국산 미사일)은 얻고, 바이든 대통령이 원하는 것(대폭 증산)은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바이든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슬며시 비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던 빈 살만 왕세자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OPEC+ 회의 이틀 전 미국 정부는 올해 3월 중단된 '이란 핵합의 복원'을 위한 협상에 다시 나선다고 밝혔습니다. 사우디가 원하는 만큼 증산에 나서주지 않을 경우 그 대안으로 이란산 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라는 분석이 나오는데…, 중동의 숙적 사우디와 이란 사이에서 계속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바이든 대통령의 앞날이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OPEC+는 산유국들의 제한된 증산 여력, 경기침체 우려에 따른 원유 수요 감소 전망 등을 고려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 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6월초 하루 평균 9000만 배럴을 넘어섰던 미국 원유 수요량은 계속 감소하고 있네요. 어쩌면 사우디의 결정은 그 어떤 외교적 계산 없이 정말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 측면만 고려해 내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막대한 자원을 가진 나라의 힘이 얼마만큼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바이든 대통령과 빈 살만 왕세자가 만나는 장면은 외교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것 같습니다.
"바이든 면전에 일격 가했다"…사우디 왕세자의 '뒤끝' [글로벌 핫이슈]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