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주차장 수돗물길 찾아온 달팽이
이슬처럼 작은 것에 담긴 큰 깨달음
모소 대나무는 5년째에 폭풍성장
미술관·바다·사람들과의 수다 등
소소한 일상이 시적 에너지 근원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아
이소연 시인
이슬처럼 작은 것에 담긴 큰 깨달음
모소 대나무는 5년째에 폭풍성장
미술관·바다·사람들과의 수다 등
소소한 일상이 시적 에너지 근원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아
이소연 시인
하얗게 텅 빈 워드 화면을 바라보며 방금 나도 모르게 뱉은 문장은 노르웨이 국민시인 울라브 하우게의 시 ‘진리를 가져오지 마세요’의 한 구절이다.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세요.” 빈 문서 앞에서 막막해진 내게 힘을 주는 말이다. 그래, 내가 쓰려는 건 그렇게 크고 무거운 말이 아니니까 미리 겁낼 필요는 없다. 그나저나 많은 사람이 진리를 구하고자 티베트 성지를 찾아 기도하거나 출가하고 학문에 매진하는데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구한다고 구해지지 않는 게 진리라서 누가 가져오라고 하면 냉큼 가져오지도 못할 일이지만, 가져오지 말라고 하니 왜냐고 묻고 싶어진다. 자꾸 질문하게 하는 현대 시의 이런 뜬금없음이 좋다.
며칠 전엔 아파트 주차장에서 아이와 함께 물총 싸움을 했다가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 물총에 물을 담는 과정에서 수돗물을 한참 흘려보낸 뒤였다. “엄마, 여기까지 달팽이가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뭔가를 달팽이에 비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돗물이 만든 물길을 따라 진짜 달팽이 하나가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여름 밤에 흘려보낸 가는 물줄기가 불러온 작은 생명체는 여태 어디 숨었다 나온 걸까? 다니기 좋은 촉촉하고 싱그러운 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우리 앞에 나타나 준 달팽이가 놀랍도록 신비로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온다는 게 이렇게 큰 거였구나. 달팽이를 다시 풀잎 위로 보내주고는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상실했다고 여긴 삶의 작고 소중한 풍경들이 어딘가에 잘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나타나 줄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기 위해 달팽이는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몰랐다.
매일 아침 세수하고 냉장고에서 서리태 콩물을 꺼내 따라 마신다. 집을 나서기 전엔 옷장을 뒤적이며 궁리하는 시간이 길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잘 갖춰 입은 날은 거울을 보며 웃는다. 도서관으로 출근해서 읽은 책들의 목록을 노트에 적어둔다. 그렇게 매일매일 이슬처럼 작은 것들을 가져와 쌓는다. 삶의 한순간 한순간에 몰입하다 보니 의미 없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나는 모소 대나무를 좋아한다. 중국 극동지방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다. 모소 대나무 씨앗은 4년 동안 땅속에서 겨우 3㎝만 자란다고 한다. 그러다 5년이 되는 순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그게 다 4년 동안 성실히 뿌리를 내린 덕분이라고 한다. 나는 등단도 늦은 편이었고 첫 시집 상재도 늦은 편이었다. 그러는 동안 주변 동료로부터 염려의 말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시를 어떻게 쓰냐?” “남의 일에 오지랖 떨 시간에 자신에게 집중해라” “너무 많은 일을 하다가 소모되는 것 아니냐?” 등. 다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데 내게 시는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찾아오지 않는 무엇이다. 오히려 시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찾아오곤 했다. 강의하다가,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미술관에서, 바다에서, 버스에서…. 나는 자주 책방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시를 쓸 에너지를 얻었다. 물론 고요한 이들의 시 쓰기를 동경한다. 오래오래 자기 안에 머물며 자라온 마음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이들이 시와 더 어울려 보인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이 나를 감싸 안는다. 그러다가도 시는 바깥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우겨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위례의 작은 서점으로 동시 특강을 가게 됐는데, 거기서 만난 한 아이의 시가 잊히지 않는다. 종이를 나눠 주고 좋아하는 것을 쓰라고 했다. 그 아이는 좋아하는 것을 적는 칸에 고등어라고 쓰고는 고등어에 대한 시를 썼다. 학교에서 돌아와 부엌 도마 위에서 팔딱거리는 생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마지막 부분이 압권인 시였다. 아이는 지금껏 자신이 좋아한 것이 죽은 고등어였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아이에게는 살아 팔딱이는 생명체가 죽음보다 낯설었던 것이다. 지금껏 죽어 요리된 고등어만을 생각하고 좋아해 왔다는 걸 깨닫는 지점에서 나는 언뜻 진리를 본 것도 같다. 진리는 멀리 있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무엇일지도 모른다.
진리란 어쩌면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는 순간에 있지 않을까? 책을 읽다가 번쩍,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진리이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근처 백반집이 진리구나 싶다. 주차장에 나타난 두꺼비는 아침부터 꿈적하지 않고 있더니 9시 뉴스의 시작과 함께 엉금엉금 기어나와 긴 혀로 여름밤의 몸이 되기 위해 움직인다. 그나저나 나는 입 냄새가 나는 마스크를 빨아놓아야 하는데 귀찮고, 아침식사 장만하는 것이 귀찮다. 이럴 땐 휴가가 진리인데,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나에게 누군가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물으면 “모소 대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슬처럼 작은 것들을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며칠 전엔 아파트 주차장에서 아이와 함께 물총 싸움을 했다가 뜬금없는 말을 들었다. 물총에 물을 담는 과정에서 수돗물을 한참 흘려보낸 뒤였다. “엄마, 여기까지 달팽이가 왔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가 뭔가를 달팽이에 비유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돗물이 만든 물길을 따라 진짜 달팽이 하나가 기어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여름 밤에 흘려보낸 가는 물줄기가 불러온 작은 생명체는 여태 어디 숨었다 나온 걸까? 다니기 좋은 촉촉하고 싱그러운 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우리 앞에 나타나 준 달팽이가 놀랍도록 신비로워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온다는 게 이렇게 큰 거였구나. 달팽이를 다시 풀잎 위로 보내주고는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상실했다고 여긴 삶의 작고 소중한 풍경들이 어딘가에 잘 숨어 있다가 때가 되면 나타나 줄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기 위해 달팽이는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몰랐다.
매일 아침 세수하고 냉장고에서 서리태 콩물을 꺼내 따라 마신다. 집을 나서기 전엔 옷장을 뒤적이며 궁리하는 시간이 길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잘 갖춰 입은 날은 거울을 보며 웃는다. 도서관으로 출근해서 읽은 책들의 목록을 노트에 적어둔다. 그렇게 매일매일 이슬처럼 작은 것들을 가져와 쌓는다. 삶의 한순간 한순간에 몰입하다 보니 의미 없는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
나는 모소 대나무를 좋아한다. 중국 극동지방에서만 자라는 희귀종이다. 모소 대나무 씨앗은 4년 동안 땅속에서 겨우 3㎝만 자란다고 한다. 그러다 5년이 되는 순간, 폭발적으로 성장하는데 그게 다 4년 동안 성실히 뿌리를 내린 덕분이라고 한다. 나는 등단도 늦은 편이었고 첫 시집 상재도 늦은 편이었다. 그러는 동안 주변 동료로부터 염려의 말도 많이 들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시를 어떻게 쓰냐?” “남의 일에 오지랖 떨 시간에 자신에게 집중해라” “너무 많은 일을 하다가 소모되는 것 아니냐?” 등. 다 맞는 말이어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런데 내게 시는 책상에 앉아 있는다고 찾아오지 않는 무엇이다. 오히려 시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찾아오곤 했다. 강의하다가, 친구들과의 수다에서, 미술관에서, 바다에서, 버스에서…. 나는 자주 책방 사람들과 웃고 떠들면서 시를 쓸 에너지를 얻었다. 물론 고요한 이들의 시 쓰기를 동경한다. 오래오래 자기 안에 머물며 자라온 마음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이들이 시와 더 어울려 보인다. 나는 재능이 없는 걸까?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자책이 나를 감싸 안는다. 그러다가도 시는 바깥에서 만나는 것이라고 우겨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위례의 작은 서점으로 동시 특강을 가게 됐는데, 거기서 만난 한 아이의 시가 잊히지 않는다. 종이를 나눠 주고 좋아하는 것을 쓰라고 했다. 그 아이는 좋아하는 것을 적는 칸에 고등어라고 쓰고는 고등어에 대한 시를 썼다. 학교에서 돌아와 부엌 도마 위에서 팔딱거리는 생선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마지막 부분이 압권인 시였다. 아이는 지금껏 자신이 좋아한 것이 죽은 고등어였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했다. 아이에게는 살아 팔딱이는 생명체가 죽음보다 낯설었던 것이다. 지금껏 죽어 요리된 고등어만을 생각하고 좋아해 왔다는 걸 깨닫는 지점에서 나는 언뜻 진리를 본 것도 같다. 진리는 멀리 있지도 않고 크지도 않은 무엇일지도 모른다.
진리란 어쩌면 이슬처럼 작은 것을 가져오는 순간에 있지 않을까? 책을 읽다가 번쩍, 밑줄 긋고 싶은 문장이 진리이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근처 백반집이 진리구나 싶다. 주차장에 나타난 두꺼비는 아침부터 꿈적하지 않고 있더니 9시 뉴스의 시작과 함께 엉금엉금 기어나와 긴 혀로 여름밤의 몸이 되기 위해 움직인다. 그나저나 나는 입 냄새가 나는 마스크를 빨아놓아야 하는데 귀찮고, 아침식사 장만하는 것이 귀찮다. 이럴 땐 휴가가 진리인데,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나에게 누군가 왜 아무것도 안 하느냐고 물으면 “모소 대나무처럼 뿌리를 내리는 중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슬처럼 작은 것들을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