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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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수출을 견인해 온 국내 전자회사들은 경기 둔화 조짐이 공식 수치로 고스란히 드러나자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 2분기 실적에서 소비 둔화 분위기를 감지하긴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각국 정부가 ‘코로나19 엔데믹’을 선언할 경우 경기가 다시 반등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 성장률과 수출입동향 등 대부분 경제 지표들이 경기가 꺾이고 있는 쪽을 가리키면서 기업들도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대기업들은 보수적 투자 기조로 돌아섰고, 반도체·가전 중소기업들은 현금 유동성 확보에 나섰다.

반도체 성장률 눈에 띄게 둔화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반도체 시장 성장률이 급격히 둔화하고 있다. 4일(현지시간)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에 따르면 6월 세계 반도체 판매액은 전년 동월 대비 13.3%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는 5월 증가율(18.0%)보다 한층 낮아진 수치다. 이로써 세계 반도체 판매 증가세는 6개월 연속 둔화하며 2018년 미·중 무역 분쟁 이후 최장 기간 둔화세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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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 반도체 가격도 급락했다. 최근 대만 시장조사회사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의 7월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2.88달러였다. 전달(3.35달러)보다 14.03% 급락했다. 2019년 2월 후 최대 하락폭이다. 고정거래가가 2달러대로 떨어진 것은 2020년 이후 처음이다.

한국 반도체 수출에서도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7월 수출입동향에 따르면 한국의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6월 10.7%에서 7월 2.1%로 낮아졌다. 4월 이후 4개월 연속 둔화세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이 10% 밑으로 떨어진 것은 2016년 10월 후 5년9개월 만이다.

전문가들은 메모리 반도체가 들어가는 가전 및 정보기술(IT) 제품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뛰면서 세계적으로 인플레이션이 확산했다. 물가 부담에 소비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세계 중앙은행들이 일제히 기준금리를 올리면서 소비 심리마저 위축시키고 있다.

스마트폰·TV 수요 꺾여

메모리 및 고사양 시스템 반도체 수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마트폰과 가전제품에서 본격적인 소비 둔화가 나타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2분기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은 2억9450만 대로 집계됐다. 분기 스마트폰 출하량이 3억 대 이하로 떨어진 것은 2020년 2분기 후 처음이다.

업계는 스마트폰 시장은 올 하반기에도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최근 들어 여러 제조사가 올해 연간 스마트폰 판매량 전망치를 전년 대비 3~10% 내려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거시경제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소비자 수요 감소, 원자재값 상승 등이 지속되면서 스마트폰 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TV와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 수출도 지난달 17억7000만달러로 전년 동기보다 2.7% 감소했다.

TV 판매가 부진하면서 디스플레이 업체엔 재고가 계속 쌓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SCC에 따르면 LG디스플레이의 패널 재고는 올해 1분기 68일치에서 2분기 81일치로 늘었다. 역대 최장 수준이다. 1분기 삼성디스플레이의 패널 재고도 94일치에서 102일치로 늘었다. LG디스플레이는 하반기 거시경제 및 시장 수요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질 것에 대비해 사업 구조 재편과 원가 절감을 통해 수익성을 개선할 방침이다.

반도체·가전 업황이 악화하면서 삼성전자 실적 전망치는 큰 폭으로 하향 조정됐다. 올해 영업이익 컨센서스(증권사 전망치 평균)는 5월 말 63조6000억원에서 6월 말 60조6000억원, 지난 4일 54조3000억원으로 떨어졌다. 두 달 새 14.6% 감소했다. LG전자 영업이익 컨센서스도 4월 4조8000억원에서 지난 4일 4조4000억원으로 10%가량 낮아졌다.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전자업체 투자 기조도 보수적으로 바뀌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충북 청주공장 증설 계획을 전격 보류했다. 고환율·고물가·고금리 등 경제 여건 악화를 고려해서다. 전자 부품업체들은 현금 유동성 확보에 들어갔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의 재고가 늘면서 신규 주문이 감소한 탓이다. 업계 관계자는 “하반기에도 재고 부담과 패널 가격 하락 리스크가 클 것”이라며 “가전·반도체 수출도 둔화세가 이어질 전망”이라고 했다.

박신영/정지은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