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가 사랑한 화가…이중섭의 모든 것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이건희컬렉션 시즌 2 '이중섭'
국립현대미술관 개최
李 컬렉션에서 가장 많은 이중섭
전성기 작품 90여점으로 특별전
'닭과 병아리' '물놀이 하는 아이들'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
'춤추는 가족'은 40년 만에 전시
1940년대 일본 유학 시기
부인에게 보낸 엽서화 36점
日로 떠난 가족 그린 '현해탄'
'소' 외에 다양한 작품 볼 수 있어
국립현대미술관 개최
李 컬렉션에서 가장 많은 이중섭
전성기 작품 90여점으로 특별전
'닭과 병아리' '물놀이 하는 아이들'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
'춤추는 가족'은 40년 만에 전시
1940년대 일본 유학 시기
부인에게 보낸 엽서화 36점
日로 떠난 가족 그린 '현해탄'
'소' 외에 다양한 작품 볼 수 있어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가장 사랑한 국내 화가는 누구였을까. 이 회장이 특정인을 거론한 적은 없지만, 미술계는 ‘국민 화가’ 이중섭(1916~1956)을 첫손에 꼽는다. 이 회장 유족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미술품 1488점 중 가장 많은 작품을 그린 작가(회화·드로잉 기준)가 이중섭(34점)이란 이유에서다. 여기에 ‘은지화’ 등을 더한 총 작품 수는 104점에 달한다.
이 회장은 ‘황소’ 등 주요 작품은 물론 이중섭이 주고받은 편지 등 각종 기록물까지 수집했다. “삼성이 작품을 빌려주지 않으면 이중섭 전시를 여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 미술계에서 나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살 때도 하나하나 까다롭게 골랐던 이 회장이 이중섭 작품만큼은 대량으로 사들였다”며 “그만큼 이중섭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전시는 이중섭이 살아온 궤적을 따라간다. 1916년 평안남도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20대까지 남 부러울 것 없는 ‘도련님’으로 살았다. 1935년 일본으로 미술 유학길에 올랐고, 1940년부터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연애를 시작한다. 전시장에 나온 ‘엽서화’ 36점은 대부분 이 즈음 이중섭이 야마모토에게 보낸 연애편지다. 이중섭은 글 대신 그림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아 보냈다. 발을 다친 야마모토에게 약을 발라주는 일화를 그린 그림(1941), 환상 속 낙원을 표현한 듯한 그림(1941)이 대표적이다.
이중섭은 태평양전쟁이 격해지던 1943년 귀국한다. 전시장에 걸린 ‘소년’(1942~1945)과 ‘세 사람’(1942~1945) 등 연필화는 이 무렵 그린 작품들이다. 이중섭은 1944년 마침내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마사코를 데려와 전통 혼례를 올린다.
이중섭 가족은 1951~1952년 조카가 머물던 제주도로 향한다. 단칸방에 살며 게와 조개를 잡아먹었지만, 네 가족이 함께 지낸 삶은 행복했다.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제주도에서 보낸 나날을 그리워했다. 이 짧은 행복마저 1952년 장인의 장례식을 계기로 가족들을 일본에 보내며 11개월 만에 끝났다.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1950년대 전반 작품 ‘물놀이하는 아이들’, ‘닭과 병아리’도 이중섭이 제주도 생활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들이다. 현해탄을 건너 가족을 보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현해탄’(1954)도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막일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던 이중섭은 정신질환과 황달 등을 앓다 1956년 4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는 이중섭의 말년 어려움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은박지에 철판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물감이나 먹물을 솜 등으로 문질러 완성했다. 윤 관장은 “크기는 작지만 구성 등을 통해 이중섭 작품세계의 정수를 볼 수 있다”며 “은지화를 30점이나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4월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이 회장은 ‘황소’ 등 주요 작품은 물론 이중섭이 주고받은 편지 등 각종 기록물까지 수집했다. “삼성이 작품을 빌려주지 않으면 이중섭 전시를 여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이 미술계에서 나돈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세계적인 화가의 작품을 살 때도 하나하나 까다롭게 골랐던 이 회장이 이중섭 작품만큼은 대량으로 사들였다”며 “그만큼 이중섭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 2부는 이중섭전
국립현대미술관은 12일부터 이중섭의 1940~1950년대 전성기 작품 90여 점과 관련 기록물을 선보이는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을 연다. 지난해 7월부터 지난 6월까지 관람객 25만 명을 끌어모은 ‘이건희 컬렉션’의 2부를 이중섭으로 꾸민 것이다. 이중섭의 작품 104점 중 80여 점을 추린 뒤 미술관 소장품 10점을 더해 걸었다. 다만 ‘흰소’(미국 LA 카운티 미술관)와 ‘황소’, ‘현해탄’(국립중앙박물관) 등 외부 전시에 나간 작품은 빠졌다.전시는 이중섭이 살아온 궤적을 따라간다. 1916년 평안남도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그는 20대까지 남 부러울 것 없는 ‘도련님’으로 살았다. 1935년 일본으로 미술 유학길에 올랐고, 1940년부터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와 연애를 시작한다. 전시장에 나온 ‘엽서화’ 36점은 대부분 이 즈음 이중섭이 야마모토에게 보낸 연애편지다. 이중섭은 글 대신 그림에 하고 싶은 말을 담아 보냈다. 발을 다친 야마모토에게 약을 발라주는 일화를 그린 그림(1941), 환상 속 낙원을 표현한 듯한 그림(1941)이 대표적이다.
이중섭은 태평양전쟁이 격해지던 1943년 귀국한다. 전시장에 걸린 ‘소년’(1942~1945)과 ‘세 사람’(1942~1945) 등 연필화는 이 무렵 그린 작품들이다. 이중섭은 1944년 마침내 가족이 사는 원산으로 마사코를 데려와 전통 혼례를 올린다.
애절한 그리움 녹아 있는 걸작들
미술사가들은 1950년대를 이중섭의 최전성기로 꼽는다. 하지만 이 시기 그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 들어선 공산 정권이 원산에서 백화점을 운영하던 형을 자본가로 몰아 처형하면서 생활고가 시작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중섭과 야마모토는 부산으로 내려가 피란생활을 한다. 평생 넉넉했던 부잣집 아들은 졸지에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게 됐다.이중섭 가족은 1951~1952년 조카가 머물던 제주도로 향한다. 단칸방에 살며 게와 조개를 잡아먹었지만, 네 가족이 함께 지낸 삶은 행복했다. 이후 그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제주도에서 보낸 나날을 그리워했다. 이 짧은 행복마저 1952년 장인의 장례식을 계기로 가족들을 일본에 보내며 11개월 만에 끝났다. 이번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는 1950년대 전반 작품 ‘물놀이하는 아이들’, ‘닭과 병아리’도 이중섭이 제주도 생활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들이다. 현해탄을 건너 가족을 보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그린 ‘현해탄’(1954)도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막일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던 이중섭은 정신질환과 황달 등을 앓다 1956년 40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는 이중섭의 말년 어려움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은박지에 철판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물감이나 먹물을 솜 등으로 문질러 완성했다. 윤 관장은 “크기는 작지만 구성 등을 통해 이중섭 작품세계의 정수를 볼 수 있다”며 “은지화를 30점이나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4월 2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