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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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스 케인스는 100년 뒤 사람들이 넘치는 여가 시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기술 발전으로 2030년까지 평균 노동시간은 주 15시간으로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게 그의 예측이었다. “빵을 버터 위에 얇게 펴 바르듯이, 노동을 최대한 넓게 공유해야 한다”고도 했다.

1960년대 미국 상원은 2000년이면 주 14시간 노동이 실현 가능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당시 미국 싱크탱크 랜드연구소는 인구 2% 정도면 미국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들 전망이 틀렸다는 건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일에 시달려 사망에 이르는 ‘과로사’, 극도의 피로로 무기력증과 자기혐오에 빠지는 ‘번아웃 증후군’ 등에 대한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최근 국내 출간된 <가짜 노동>은 ‘가짜 노동’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가짜 노동이란 하는 일 없이 바쁘고 무의미하게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다. 의미 없는 업무, 자기 발전이나 기업 혁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 등을 말한다. 빈둥거리는 것보다도 나쁘다. 시간을 소모하고 스트레스와 피로를 쌓는 ‘헛일’이어서다.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
가짜 노동은 왜 생겨나는 걸까. 책은 사회 발전이 역설적으로 가짜 노동을 늘렸다고 본다. 신기술은 더 많은 노동을 창출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시시각각 전달되는 정보와 이에 따라 바뀌는 시스템이 일은 많이 하는데 제대로 된 성과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교육, 홍보, 경영 컨설팅 등 성과를 계량화하기 힘들고 ‘이만하면 됐다’고 완료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나는 것도 원인이다. 주로 사무직에서 가짜 노동 탓에 직장인의 만족도는 낮아지고 지나치게 오래 일한다.

‘남에게 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일’도 가짜 노동을 늘린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듣는 회의, 프로젝터가 꺼지자마자 잊힐 프레젠테이션, 모든 것의 문서화, 근무 시간이 길어야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낡은 업무방식과 고정관념 등이 업무의 질을 떨어뜨린다. 책은 “일이 잘못되는 걸 막지 못하는 감시나 관리도 가짜 노동”이라고 꼬집는다.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
책은 가짜 노동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자신의 가짜 노동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일터의 경험을 들려준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문제를 진단해나간다.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하기’ ‘회의는 무조건 짧을수록 좋다’ ‘타인에 대한 모방을 경계한다’ ‘관리직의 수는 적을수록 좋다’ 등이다.

고용시장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들자는 제안도 담았다. 단, “임시 프로젝트 노동자도 정규 근로자와 같은 수준의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책의 저자는 덴마크 인류학자 데니스 뇌르마르크와 철학자 아네르스 포그 옌센이다. 두 사람은 TV 프로그램에서 토론 맞수로 처음 대면했다. ‘지식 집약 노동 분야의 사람들이 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스웨덴 사회학자 롤란드 파울센의 논문을 두고 찬반 토론을 벌였다. 두 사람은 토론 이후 갈수록 상대의 주장을 곱씹게 되면서 함께 책까지 쓰게 됐다.

정치적 입장이 전혀 다르고 상반된 주장을 펼치던 두 저자가 함께 쓴 책이라 노사 양측의 입장이 비교적 고르게 담겨 있다. 2018년 덴마크에서 출간됐을 당시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가 추천 책으로 꼽아 크게 주목받았다. ‘가짜 노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근로자 개개인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책은 버트런드 러셀의 문장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계가 발명되기 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총력을 기울여왔다. 어리석었지만 영원히 어리석게 지낼 이유는 없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