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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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사이의 신경전이 자본시장으로 옮겨갔다. 미국 규제당국이 회계 감사의 고삐를 조이자 중국 국영기업들이 잇따라 자진 상장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15일(현지시간) 블룸버그는 덴마크 삭소은행의 레드먼드 웡 애널리스트를 인용해 중국 대기업이 연달아 자진 상장 폐지할 거라고 보도했다. 웡 애널리스트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며 중국이 미국 규제당국에 양보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 “곧 동방항공·남방항공이 상장폐지 수순을 밟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방항공과 남방항공은 1997년 미국 증시 기업공개(IPO)를 통해 2억 2700만달러(약 2천975억원), 6억3천200만달러(약 8282억원)를 각각 조달했다. 두 회사 모두 홍콩과 중국 증시에도 동시 상장돼 있다.

두 기업에 앞서 중국 최대 에너지 회사인 중국석유화공과 페트로차이나, 중국알루미늄기업, 중국생명보험, 시노펙상하이석유화학 등 5개 기업이 지난 11일 뉴욕증시 상장폐지를 발표했다. 5개 기업은 오는 20∼25일 자진 상장폐지 신청서를 제출한 뒤 약 10일 뒤 상장 폐지된다. 이 기업들에 이어 중국 동방항공과 남방항공도 상장폐지 행렬을 뒤따를 거란 전망이다.

자진 상장폐지는 중국 당국의 결정에 따른 조치란 해석이 나온다. 동방항공과 남방항공은 중국 국무원의 국유자산 감독관리위원회(SASAC)의 통제받고 있다. 두 기업에 앞서 상장폐지를 발표한 5개 기업 중 4곳이 SASAC의 관할 아래 있다.

미국이 감사의 고삐를 조이자 중국이 상장폐지를 선택했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회계 감독기구인 상장기업회계감독위원회(PCAOB)가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을 조사할 권리를 요구해왔다. 중국은 주권을 내세워 이들 기업이 PCAOB의 감사를 제한해왔다. 미 규제당국이 중국 국가안보와 관련한 기밀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다.

미국 규제당국은 2020년 말 칼을 빼 들었다. 회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외국 기업을 증시에서 퇴출하도록 규정한 ‘외국회사문책법’을 도입해 이듬해 발효했다. PCAOB의 회계감사를 3년 연속 통과하지 못한 외국 기업을 미국 증시에서 퇴출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사실상 중국 기업을 겨냥한 법안으로 미국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273개가 2024년까지 상장 폐지 절차를 밟아야 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3월 알리바바 등 미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1259개를 ‘잠재적 퇴출 명단’에 포함했다. 미국 의회는 2024년으로 정해진 상장폐지 마감 기한을 2023년으로 단축하는 법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웡 애널리스트는 “수많은 중국 개인들과 기업·기관들에 대해 막대한 양의 민감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중국 인터넷·플랫폼 기업들도 미국 증시를 떠날 가능성이 있다”며 “알리바바와 핀둬둬, JD닷컴(징둥), 바이두, 소후닷컴, 웨이보, 비리비리, 아이치이, KE홀딩스, 텐센트 뮤직엔터테인먼트 그룹 등도 자진 상폐 후보다”라고 내다봤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