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길수여, 내 동생 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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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장 ohdy@kosi.re.kr
어머니와 아버지는 고스톱을 꽤 즐기셨다. 간혹 아버지는 점수 계산을 못하셨다. 나이 탓이려니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타박이 뒤따랐다. 아직도 애정 싸움을 하시나 싶어 피식 웃곤 했다. 어머니가 급작스레 병원에 입원하셨다. 그제야 아버지가 치매를 앓고 계신 걸 알았다. 그동안 홀로 아버지를 감당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죄스러웠다. 이제 아버지의 치매는 오롯이 나의 몫이 됐다. 좋은 병원을 찾아서 검사란 검사는 다 했다. 비싼 약을 먹어도 치매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고스톱은 치매를 예방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아버지의 아침밥부터 챙겨야 했다. 아버지는 생전 부엌에 가본 적이 없다. 게다가 가스레인지라도 잘 못 다루면 큰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아침 7시에 우리 집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길 하나 건너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새벽 2시에 오기도 하셨고, 집 호수를 잊어버려 꼭두새벽에 모든 집의 벨을 누르기도 하셨다. 하루는 속옷 차림으로 오셨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마음 저 밑에서 답답함이 끓어올랐다. 그래봤자 난 더 불효자가 될 뿐이었다. 때론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아버지를 맡겼다. 아이들과 병상의 어머니, 거기에 아버지까지 아내가 무슨 수로 감당하랴. 몸이 버티질 못했다.
결국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셨다.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요양원에 대한 기대가 컸나 보다. 나와 요양원은 아버지를 사이에 둔 상업적 관계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늘 남의 옷을 입고 있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자기 옷을 챙길 리 없었다. 불편하고 불쾌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꾹 참았다. 아버지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가끔 요양원에서 전화가 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남의 핸드폰을 부쉈고, 화분의 나무를 다 뽑았고, 멀쩡한 커튼을 뜯어냈다고 한다. 보상은 당연했고, 난 요양원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게 심해지면 요양원에서 슬슬 눈치를 준다. 그럴 때면 다른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요양원 생활이 감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 때문에 더 그렇다. 외부와 단절된 채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시간을 보내신다. 치매라서 그 답답함을 견디는 게 아닐까 싶다.
가능하면 자주 아버지를 뵈러 가려 한다.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실 할 수 있는 대화도 별로 없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유리 벽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래도 날 보면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길수여, 내 동생 길수.” 날 동생으로 착각하신다. 섭섭하고 허망하기까지 하다. 새로 옮긴 요양원에선 꽤 편한 모습이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를 뵈러 간다. “동윤이여, 내 아들 동윤이.” 이 말이 듣고 싶다.
아버지의 아침밥부터 챙겨야 했다. 아버지는 생전 부엌에 가본 적이 없다. 게다가 가스레인지라도 잘 못 다루면 큰일이다 싶었다. 그래서 아침 7시에 우리 집에서 같이 먹기로 했다. 길 하나 건너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새벽 2시에 오기도 하셨고, 집 호수를 잊어버려 꼭두새벽에 모든 집의 벨을 누르기도 하셨다. 하루는 속옷 차림으로 오셨다. 나도 모르게 버럭 화를 냈다. 마음 저 밑에서 답답함이 끓어올랐다. 그래봤자 난 더 불효자가 될 뿐이었다. 때론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에게 아버지를 맡겼다. 아이들과 병상의 어머니, 거기에 아버지까지 아내가 무슨 수로 감당하랴. 몸이 버티질 못했다.
결국 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셨다.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요양원에 대한 기대가 컸나 보다. 나와 요양원은 아버지를 사이에 둔 상업적 관계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늘 남의 옷을 입고 있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자기 옷을 챙길 리 없었다. 불편하고 불쾌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꾹 참았다. 아버지에게 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가끔 요양원에서 전화가 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남의 핸드폰을 부쉈고, 화분의 나무를 다 뽑았고, 멀쩡한 커튼을 뜯어냈다고 한다. 보상은 당연했고, 난 요양원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다. 그게 심해지면 요양원에서 슬슬 눈치를 준다. 그럴 때면 다른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요양원 생활이 감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코로나 때문에 더 그렇다. 외부와 단절된 채 묵묵히 고개를 떨구고 시간을 보내신다. 치매라서 그 답답함을 견디는 게 아닐까 싶다.
가능하면 자주 아버지를 뵈러 가려 한다. 생각처럼 쉽지 않다. 사실 할 수 있는 대화도 별로 없다. 게다가 코로나 때문에 유리 벽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다. 그래도 날 보면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길수여, 내 동생 길수.” 날 동생으로 착각하신다. 섭섭하고 허망하기까지 하다. 새로 옮긴 요양원에선 꽤 편한 모습이다. 오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아버지를 뵈러 간다. “동윤이여, 내 아들 동윤이.” 이 말이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