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모두가 매일 참회하는 도시,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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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70년…독일의 끝없는 반성
베를린 중심엔 유대인 추모비
도로 표지판엔 당시 금지 조항
"추모란 매일 밥먹듯 하는 것"
빌딩 지을 땅에 추모관과 추모비
시민들이 만든 참회의 DNA
포용과 관용이 만든 '강한 독일'
김보라 문화부 차장
베를린 중심엔 유대인 추모비
도로 표지판엔 당시 금지 조항
"추모란 매일 밥먹듯 하는 것"
빌딩 지을 땅에 추모관과 추모비
시민들이 만든 참회의 DNA
포용과 관용이 만든 '강한 독일'
김보라 문화부 차장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수많은 강철 조각 사이를 걷는다. 원형의 강철들은 밟힐 때마다 서로 마찰하며 ‘쨍그랑’ 소리를 낸다. 거칠고 맑은 음들이 교차한다. 발밑을 내려다보니 원형 조각은 누군가의 얼굴 모양이다. 굳게 다문 입, 질끈 감은 눈, 크게 놀라 벌어진 입과 코까지 표정들이 다양하다. 옆에서 걷는 이들의 발걸음이 합쳐진다. 군중의 발로 만든 쇳소리는 좁고 긴 복도에서 끝없이 공명한다. 복도의 끝엔 좁고 어두운 적막이 기다린다.
지난 주말 찾아간 독일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의 ‘공백의 기억(Memory of Void)’(사진) 공간에서였다. 누군지 모를 이들의 얼굴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얼마나 더 걸어야 나치가 숨을 거둬간 600만 명의 생명을 추모할 수 있을까. 한때 내가 먼저 떠나보낸 이들의 얼굴을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이 박물관뿐만이 아니다. 베를린은 도시 전체가 추모관이다. 도심 한복판에 검은 비석 2711개가 거대한 무덤처럼 일렁인다. 2005년 완공된 ‘홀로코스트 기념비’. 이 거대한 무덤의 면적은 1만9073㎡(약 5770평)다. 축구장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다. 동독 경비대의 총에 맞아 검문소 앞에서 죽어간 18세 소년 페터 페히터를 기리는 추모비도 있다. 게슈타포와 나치 친위대 본부가 있던 자리는 가해자들의 만행을 다루는 상설 전시공간이다. 조상들이 저질렀던 수치의 시간을 잊지 않고 기록한다. 대체 어떤 나라가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수도 한복판에 이토록 거대하게 진열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독일은 끊임없이 과거사를 사죄한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뒤 독일 정부 고위직들은 피해 국가의 종전 관련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정부는 종전 후 역사 청산을 위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머물지 않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나치를 찬양하는 이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하기도 했다.
독일이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증거는 독일의 길거리에 있다. 베를린에서 걷다 보면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게 된다. 이 도시에만 7618개가 있다. 가로, 세로 10㎝의 구릿빛 돌이 바닥 곳곳에 있는데, 그 돌 사이엔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유대인들의 이름과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프로젝트를 1992년 시작한 예술가 귄터 뎀니히는 “걸림돌(추모)은 당신의 집 앞에, 회사의 문 앞에, 학교의 건널목에 어디든 존재한다”고 했다. ‘걸림돌 프로젝트’는 유럽 전역에 확산돼 6만 개가 넘는 걸림돌이 생겨났다.
도로의 표지판에도 있다. 1993년부터 설치된 도로 표지판엔 유대인 기본권 박탈을 암시하는 다양한 표식을 찾을 수 있다. 도장의 그림이 적힌 가로 50㎝, 세로 70㎝의 네모난 표지판은 ‘유대인 공무원은 더 이상 공직에 종사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서류철, 망치, 담뱃값, 시계, 소시지 등의 문양도 보였다. 이 지역에 살던 유대인이 나치 정권에 의해 박탈당한 권리들이다. 유대인은 오후 8시 이후 집 밖에 나갈 수 없고, 독립적인 장인으로 활동할 수 없으며, 유대인에겐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등의 뜻이 담긴다. 그 옛날 누군가의 삶을 옭아맸던 시간을 부지런히 보여준다.
그렇게 베를린은 일상 속에서 과거를 반성한다. 독일인에겐 이제 속죄와 참회가 하나의 DNA가 됐다. 독일 곳곳의 유대인 추모관과 전쟁 참회 시설은 시민 사회와 언론 등 지식인들이 나서서 구축했다. “그 범죄를 기억하는 것은 독일에 절대 끝나지 않을 의무”라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말처럼, 독일인들은 아파트를 지을 땅에 추모관을 만들고, 고층 빌딩을 세울 땅에 추모비를 세웠다. 일상에서 지난 과거를 영원히 잊지 않는 것만이 용서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기억의 힘은 강한 독일을 만들었다. 독일은 지난 30년간 동독 지역 재건 사업에 2조유로(약 2700조원)를 쏟아부었다. 납세자들도 작년까지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소득세 외에 5.5%를 추가로 냈다. 동독 동포들을 껴안았던 포용과 화합의 정신은 2015년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일 때도 작용했다. 당시 독일은 100만 명의 난민을 수용했는데, 유럽 전체가 받아들인 난민의 절반을 넘는다. 16세 이상 독일 인구의 절반 이상은 난민 지원활동을 했다.
사회적 연대에 돈을 쏟아붓고도 독일 경제는 굳건하다. 세계 4위, 유럽 최강의 경제 체력을 과시한다. 2008년과 2012년 경제위기 극복에서도 독일은 모범생으로 평가받았고,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도 독일 경제는 경쟁력을 확인했다.
독일인의 역사 인식을 보며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알려준 건 그런 순간적인 분노가 아니다. 우리는 희생된 이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모하고 있는가. 반성과 참회는 요란한 구호나 한 번의 사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 주말 찾아간 독일 베를린 유대인박물관의 ‘공백의 기억(Memory of Void)’(사진) 공간에서였다. 누군지 모를 이들의 얼굴 위를 걸으며 생각했다. 얼마나 더 걸어야 나치가 숨을 거둬간 600만 명의 생명을 추모할 수 있을까. 한때 내가 먼저 떠나보낸 이들의 얼굴을 나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이 박물관뿐만이 아니다. 베를린은 도시 전체가 추모관이다. 도심 한복판에 검은 비석 2711개가 거대한 무덤처럼 일렁인다. 2005년 완공된 ‘홀로코스트 기념비’. 이 거대한 무덤의 면적은 1만9073㎡(약 5770평)다. 축구장 두 개를 합쳐놓은 크기다. 동독 경비대의 총에 맞아 검문소 앞에서 죽어간 18세 소년 페터 페히터를 기리는 추모비도 있다. 게슈타포와 나치 친위대 본부가 있던 자리는 가해자들의 만행을 다루는 상설 전시공간이다. 조상들이 저질렀던 수치의 시간을 잊지 않고 기록한다. 대체 어떤 나라가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수도 한복판에 이토록 거대하게 진열할 수 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독일은 끊임없이 과거사를 사죄한다. 1970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무릎을 꿇은 뒤 독일 정부 고위직들은 피해 국가의 종전 관련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정부는 종전 후 역사 청산을 위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 머물지 않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하고 나치를 찬양하는 이들을 법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입법하기도 했다.
독일이 역사를 대하는 자세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증거는 독일의 길거리에 있다. 베를린에서 걷다 보면 수많은 걸림돌을 만나게 된다. 이 도시에만 7618개가 있다. 가로, 세로 10㎝의 구릿빛 돌이 바닥 곳곳에 있는데, 그 돌 사이엔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한 유대인들의 이름과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 프로젝트를 1992년 시작한 예술가 귄터 뎀니히는 “걸림돌(추모)은 당신의 집 앞에, 회사의 문 앞에, 학교의 건널목에 어디든 존재한다”고 했다. ‘걸림돌 프로젝트’는 유럽 전역에 확산돼 6만 개가 넘는 걸림돌이 생겨났다.
도로의 표지판에도 있다. 1993년부터 설치된 도로 표지판엔 유대인 기본권 박탈을 암시하는 다양한 표식을 찾을 수 있다. 도장의 그림이 적힌 가로 50㎝, 세로 70㎝의 네모난 표지판은 ‘유대인 공무원은 더 이상 공직에 종사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서류철, 망치, 담뱃값, 시계, 소시지 등의 문양도 보였다. 이 지역에 살던 유대인이 나치 정권에 의해 박탈당한 권리들이다. 유대인은 오후 8시 이후 집 밖에 나갈 수 없고, 독립적인 장인으로 활동할 수 없으며, 유대인에겐 담배를 팔지 않는다는 등의 뜻이 담긴다. 그 옛날 누군가의 삶을 옭아맸던 시간을 부지런히 보여준다.
그렇게 베를린은 일상 속에서 과거를 반성한다. 독일인에겐 이제 속죄와 참회가 하나의 DNA가 됐다. 독일 곳곳의 유대인 추모관과 전쟁 참회 시설은 시민 사회와 언론 등 지식인들이 나서서 구축했다. “그 범죄를 기억하는 것은 독일에 절대 끝나지 않을 의무”라는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의 말처럼, 독일인들은 아파트를 지을 땅에 추모관을 만들고, 고층 빌딩을 세울 땅에 추모비를 세웠다. 일상에서 지난 과거를 영원히 잊지 않는 것만이 용서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기억의 힘은 강한 독일을 만들었다. 독일은 지난 30년간 동독 지역 재건 사업에 2조유로(약 2700조원)를 쏟아부었다. 납세자들도 작년까지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소득세 외에 5.5%를 추가로 냈다. 동독 동포들을 껴안았던 포용과 화합의 정신은 2015년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일 때도 작용했다. 당시 독일은 100만 명의 난민을 수용했는데, 유럽 전체가 받아들인 난민의 절반을 넘는다. 16세 이상 독일 인구의 절반 이상은 난민 지원활동을 했다.
사회적 연대에 돈을 쏟아붓고도 독일 경제는 굳건하다. 세계 4위, 유럽 최강의 경제 체력을 과시한다. 2008년과 2012년 경제위기 극복에서도 독일은 모범생으로 평가받았고, 코로나19 극복 과정에서도 독일 경제는 경쟁력을 확인했다.
독일인의 역사 인식을 보며 한국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하지만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알려준 건 그런 순간적인 분노가 아니다. 우리는 희생된 이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추모하고 있는가. 반성과 참회는 요란한 구호나 한 번의 사과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