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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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미국에선 집값 걱정은 안 해요.”

지난달까지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연구직으로 일하다 사직서를 내고 미국으로 건너간 김모씨(30)는 22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을 떠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서울대 공대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는 20대 후반인 나이에 대기업 과장급으로 입사해 억대 연봉을 받으며 일했다.

하지만 그는 “나름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을 잡았지만 한국에선 부모님 도움 없이는 집을 살 수 없다고 판단했다”며 “미국은 고급 인력에 대한 대우가 훨씬 좋고 집값도 싸기 때문에 능력만 있으면 미국에 가는 것이 나에게나, 혹시 생길지 모르는 미래의 자녀에게나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귀국 안합니다"…능력 있으면 집값 싸고 대접받는 해외서 산다
인구 감소로 인해 인력 한 명 한 명이 아까운 마당에 국내 고급 인재의 ‘탈(脫)한국’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서 해외로 나가 90일 이상 체류한 내국인은 21만3000명으로 2020년 19만9000명 대비 7% 증가했다. 반면 해외에서 한국으로 입국해 90일 이상 머문 내국인 규모는 같은 기간 44만 명에서 19만 명으로 56.8% 급감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이전인 2019년(31만1000명)과 비교해도 입국 내국인 규모는 38.9% 줄어들었다.

문제는 국내 인력이 한번 한국을 떠나면 다시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외교부에 따르면 해외로 이민을 떠난 후에 다시 한국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긴 사람을 의미하는 ‘영주귀국자’ 수는 2011년 4164명에서 지난해 1812명으로 10년 사이 56.5% 감소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 유인이 그간 크게 줄었다는 의미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공학 분야 박사후과정(포스트닥터)을 밟고 있는 채모씨(30) 역시 유학하면서 한국으로 귀국할 마음을 접은 경우다. 채씨는 “함께 미국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 90% 이상이 졸업 후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려 한다”며 “모두 처음엔 학위를 따면 바로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미국에서 박사급 인력 연봉이 한국의 최소 두 배가 넘다 보니 대부분 마음을 돌렸다”고 했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유학생 대부분은 부모님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뿐”이라고 전했다.

한국을 등지고 해외에 정착하는 인력이 많아지면서 국내 산업계는 고급 인재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한 플랫폼업체 간부는 “인공지능(AI) 분야에서 유의미한 논문을 한 편이라도 쓴 인력은 석사급이라도 대부분 해외로 나가려 하기 때문에 영입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라며 “정부가 인플레이션 완화를 이유로 대기업에 연봉 인상을 자제하라는 압박을 하고 있는 점도 인재 유치에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저출산과 고급 인력 유출 심화 현상이 맞물리면서 우수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고속 성장을 이뤄온 한국이 침체의 수렁에 빠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우수 인재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자 서울대는 베트남에 해외분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 학생 위주의 기존 대학원 운영 방식으로는 연구개발(R&D) 전문가 및 고숙련 근로자를 원활히 사회에 공급하기 어려워 마련한 고육지책이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