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실리콘밸리는 '네트워크'다
“한국인으로서 차별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스팩과 합병을 통해 이달 초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한 피스컬노트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팀 황이 한 말이다. 피스컬노트는 인공지능(AI) 기반 법률·정책 빅데이터 미디어 스타트업이다. 경기 침체 우려로 주식시장이 안 좋아지면서 많은 기업이 상장을 포기하는 와중에도 과감하게 기업공개(IPO)를 결정했다. 시가총액 12억2600만달러(지난 19일 종가 기준) 기업을 키워낸 창업자도 차별을 피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그는 미국 미시간주에서 태어난 한국계 2세다.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국계 창업자와 투자자들은 ‘코리아 네트워크’의 힘을 모아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피스컬노트에 투자한 한 벤처캐피털(VC) 대표는 “차별을 뚫고 이렇게 기업을 키워냈다는 게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일”이라며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실리콘밸리에서 더욱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은 인맥 중시 사회

미국은 네트워크 사회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유력 인사의 소개를 받아 입사했다고 하면 눈총을 받지만 미국에서는 다르다. 유력인의 추천은 더 좋은 평가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기술 기업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에서도 그런 네트워크가 뚜렷이 나타난다.

글로벌 기술 기업의 유력 인사를 보면 인도와 중국 인맥이 두드러진다. 특히 최근 인도계는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 샨타누 나라옌 어도비 CEO, 아르빈드 크리슈나 IBM CEO, 산제이 메로트라 마이크론 CEO, 퍼라그 아그라왈 트위터 CEO 등 곳곳에 포진해 있다. 주요 기술 기업과 스타트업, VC 등에서 인도인들이 똘똘 뭉쳐 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네트워크 끝판왕은 유대계다. 금융계, 학계, 기업계 등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유대계 인맥은 미국을 움직인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스타트업 생태계로 좁혀서도 이스라엘 VC와 미국에 있는 유대계 VC의 투자가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은 많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을 배출해냈다. 포브스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운영되는 유니콘 기업은 92개에 이른다. 한국이 유니콘 기업 18개를 보유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한국 벤처업계도 뭉쳐야

미국에 실존하고 있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이기하 프라이머리사제파트너스 대표는 “한국인이나 한국계가 설립한 스타트업이 창업 초기 자금을 미국의 주류 VC에서 받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라며 “한국계 VC들이 초기 창업 자금을 지원하는 마중물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단 시드 머니를 투자받아야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뒤 미국 주류 VC의 투자도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한국계 네트워크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계 스타트업 모임인 ‘82스타트업’에선 선배 창업자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한국계 창업자와 투자자들이 한데 모여 실리콘밸리에서 리더십을 창출하자는 목표로 시작한 ‘팰로앨토 리더십 포럼’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계 VC 네트워크도 생겼다.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이세욱 다올벤처스 대표는 “한국계 VC들이 서로 조언해주고 함께 투자하면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