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국채 공매도 규모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상 최대치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이탈리아 정국의 불확실성이 확산하면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탈리아 국채 가격이 하락할 것이란 전망에 베팅하는 헤지펀드 운용사들의 공매도 물량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대 규모"라고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S&P글로벌 마켓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현재 이탈리아 국채 공매도 물량은 390억유로(약 52조원)를 넘어섰다. 이는 2008년 1월 이후 최대치다.

채권 가격과 반대로 움직이는 국채 금리는 최근 가파르게 급등하고 있다.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 15일 연 2.98%를 찍은 뒤 일주일여 만인 24일에는 연 3.7%까지 치솟았다. 유럽에서 가장 안전한 자산으로 평가되는 독일 국채와의 금리 격차(스프레드)는 올해 초 1.37%포인트에서 최근 2.3%포인트로 벌어졌다.

1060억달러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는 블루베이자산운용의 마크 다우딩 최고투자책임자는 "이탈리아는 가스 가격의 변동성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된 국가인 데다 최근 조기 총선을 앞두고 있는 등 정국 혼란이 계속된다는 점도 이탈리아의 위기가 현실화할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선물 파생상품을 이용해 이탈리아 10년 만기 국채를 공매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러시아 가스 공급이 줄면서 이탈리아 국채는 계속 약세를 나타냈다. 이탈리아는 그동안 독일, 동유럽 국가들과 더불어 유럽의 주요 러시아 가스 수입국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중단되면 이탈리아의 경제 규모가 5% 이상 위축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에는 9월25일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불확실성이 커진 것도 발목을 잡고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우파 연합의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형제들(Fdl) 대표가 차기 총리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공공지출 확대와 대폭적인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어 그렇잖아도 취약한 이탈리아 재정과 부채위기를 부채질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멜로니 대표가 집권하게 되면 이탈리아의 유럽연합(EU) 탈퇴를 지지하는 등 극단적인 우경화 정책을 추진해 국내 분열이 심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퇴임을 앞둔 마리오 드라기 현 총리는 최근 한 행사에서 "이탈리아는 EU에 남아야 한다. 고립의 길을 택해서는 안 된다"며 멜로니 대표를 저격했다.

이탈리아는 또 유럽중앙은행(ECB)의 기준금리 인상과 양적완화 중단 등 긴축 선회로 인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다. 이탈리아가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회원국 중 그리스에서 이어 두 번째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부채 규모는 2조3000억유로에 달한다.

ECB가 막대한 부채 시장을 지탱해 온 채권 매입 프로그램을 중단하면 이탈리아 국채 가치가 더욱 곤두박질칠 것이란 우려가 계속되고 있다. 다만 일부 헤지펀드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ECB가 최근 갱신키로 한 채권 매입 도구가 제대로 작동하면 이탈리아 국채 값 폭락과 금리 폭등의 폭이 제한될 수 있다"며 과도한 베팅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