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정책 인사이트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워싱턴 하원 의사당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를 선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워싱턴 하원 의사당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 통과를 선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8월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에 서명했다. 대기업 최소 15% 법인세 부과, 자사주 매입 기업 1% 과세 등으로 7370억 달러의 재원을 마련해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안보에 3690억 달러, 전 국민 건강보험 지원에 640억 달러, 그리고 재정적자 축소에 약 300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법안을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라고 명명한 이유는 에너지 가격과 의약품 가격을 낮춰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것이 법안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IRA 관련 기사가 쏟아지고 있다. 국내에서 생산하는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차별 조치 등 IRA로 인한 피해·수혜 업종을 분석하고, 대응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사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IRA는 또 다른 의미에서 국내 모든 기업에 매우 중요한 법안이다. 법안을 통해 러·우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및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정책 방향을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IRA 시행 이전의 상황을 간단히 뒤집어보자. 코로나19를 기점으로 기후변화 대응과 ESG 경영이 가속화되었다. 기업과 금융기관은 경쟁이라도 하듯 기후변화 및 ESG 관련 투자를 늘리고 화석연료 자산을 매각했다. 주류 경제계도 기후변화와 ESG를 미래 경쟁력의 핵심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2월 러·우전쟁을 기점으로 ESG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명확해진 기후변화 정책…ESG 새 동력

천연가스와 석유 가격이 급등했다. 용도 폐기될 운명이라 굳게 믿었던, 그래서 좌초자산이 되기 전에 빨리 처분할수록 좋다고 말하던 석탄 가격도 급등했다. 아람코, 엑손모빌, 셸 같은 화석연료 기업의 수익과 주가도 함께 급등했다. 각국 정부의 기후변화 대응 정책 기조도 흔들리고 있다. 기후변화 대응과 ESG 확산의 선봉장 역할을 자처하던 EU 국가들은 이제 석탄발전소 재가동을 검토하고 있다. ESG에 대한 확신은 불안으로 변하고 있다.

에너지 가격이 올랐다고 기후 위기가 사라지거나 질병, 기아, 성평등 등 우리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선택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다. 경제는 결국 한정된 자원을 어디에 우선적으로 배분할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다. 미국은 전 세계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경제적 선택권을 지닌 국가다. 그리고 미국의 선택은 다른 국가의 정책 의사결정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현실이다. IRA를 통해 드러난 미국의 선택과 그 선택이 ESG의 미래에 미칠 영향을 전망해보자.

기후변화와 ESG는 장기적 이슈다. 미국은 IRA를 통해 중장기적으로 기후변화 대응을 강화해나갈 것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관련 예산도 법제화했다. 2030년까지 온실가스 40% 감축은 법안의 주요 목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IRA는 처방약 가격 개혁을 통한 2650억 달러의 세출 조정을 제외한 나머지 지출액 4370억 달러 중 약 85%가 기후변화 및 에너지 분야에 투입되는 사실상의 기후변화 대응법이다.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정책기조는 미국 정치적 리더십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번 법안을 통해 흔들리던 세계 각국의 기후변화 정책도 제자리를 찾아갈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기후변화를 중심으로 시작된 ESG 붐도 계속 그 동력을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기후변화 강화 법안에 화석연료 기업은 반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엑손모빌이나 셸 같은 기업은 법안을 환영하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동안 중단된 알래스카와 멕시코만의 석유 시추권 임대 판매 재개 등 화석연료 기업에 유리한 내용이 법안에 다수 담겼기 때문이다. 독일의 석탄발전소 재가동이나 조 바이든 대통령의 중동 국가 및 석유 기업에 대한 증산 압력과 함께 각국 정부가 처한 현 상황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환경 진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부족으로 인한 당장의 사회적 불만을 해결하지 않고는 기후변화 정책에 대한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장기적 기후변화 예산 확보를 위해 단기적 희생을 감수한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전략인 셈이다.

IRA의 기본적 논리 구조는 다음과 같다.
경제·안보 전쟁의 무대 된 ‘기후변화’
에너지 위기에서 시작된 인플레이션은 정권의 불안정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1979년에 발생한 2차 오일쇼크에 따른 스태그플레이션은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의 연임 실패의 주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미국이 오랫동안 에너지 안보를 위해 중동에 집착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후변화는 오랜 기간 환경 이슈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 기후변화는 환경, 경제, 안보 이슈가 되고 있다. IRA는 기후변화 대응이 안보와 정권 유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제가 되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법안이다. 코로나19가 시작되며 많은 이가 기후변화 정책이 후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기후변화가 당면한 위기 앞에서 정책의 후순위로 밀리던 시대를 다시 보기는 힘들 듯하다.

미래 경쟁력으로 기후 기술·산업 점찍은 미국

IRA는 북미 지역에서 생산된 전기차만을 보조금 지급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다. 아울러 배터리 부품 및 광물의 원산지에 따라 보조금 지급 비율도 차등 적용할 예정이다. WTO는 동일한 제품에 대한 자국 제품과의 차별(내국민 대우), 회원국 간 차별(최혜국 대우)을 모두 금지하고 있다. 미국의 이번 조치는 WTO 규정 위반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미국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가 이를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 다시 말해, 알면서도 필요에 의해 밀어붙였다는 뜻이다.

미국이 이미 기후변화 대응 기술과 산업을 미래 경쟁력의 핵심으로 판단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앞으로 전기차뿐 아니라 경제적·전략적 가치가 높은 다른 기후변화 관련 영역에서도 이러한 흐름이 이어질 수 있다.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관련 산업의 보호무역주의가 확대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도 기후 외교와 통상 전략을 고도화해야 하며, 기후 관련 산업을 전략물자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IRA는 기후변화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흔들림 없이 지속될 것이라는 명확한 시그널을 줬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동시에 기후변화와 ESG가 본격적 경제와 안보 전쟁 무대로 진입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어려운 숙제를 안겨줬다. 이제 ‘더 많이, 더 빨리’라는 일차방정식 시대는 끝났다. 다양한 변수 속에서 기후변화와 ESG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추진해나갈지 고민해야 하는 고차방정식 시대로 접어들었다.

김태한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