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폭스바겐그룹 이사회(감독위원회)는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 최고경영자(CEO)가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노조와의 갈등 등으로 2025년까지 임기를 3년 남긴 상황에서 이뤄진 사실상의 해임이었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가 내연기관에서 전기차 중심으로 사업을 바꾸는 상황에서 그룹의 체질 개선을 주도하던 수장의 퇴진은 갑작스러웠다.

디스의 후임으로 폭스바겐 이사회가 선택한 인물은 올리버 블루메 포르쉐 CEO다. 그는 폭스바겐그룹의 럭셔리·스포츠카 브랜드 포르쉐를 7년간 이끌어왔다. 지난해 포르쉐는 전 세계에 30만1915대의 차량을 인도해 사상 최대 기록을 썼다.

블루메는 다음달 1일 폭스바겐 CEO이자 폭스바겐그룹 회장으로 취임한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 공략부터 포르쉐 기업공개(IPO)까지 그룹에는 해결해야 할 현안이 쌓여 있다.
전기차 '타이칸' 만든 포르쉐 수장, 주춤하는 폭스바겐 혁신 나선다

소통 중요시하는 리더십

외신들은 블루메를 ‘카 가이(Car Guy)’라고 부른다. 그는 정통 ‘아우디·폭스바겐 맨’이다. 1968년 독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나 브라운슈바이크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다. 브라운슈바이크는 폭스바겐 본사가 있는 볼프스부르크와 가까워 폭스바겐 직원이 많이 산다. 블루메는 대학 졸업 후 1994년 아우디의 우수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신입사원으로 채용됐다. 차체 설계 및 도장(페인트) 업무로 시작해 아우디 A3 생산 책임, 포르쉐 생산 및 물류 담당 등을 거쳐 2015년 포르쉐 CEO로 발탁됐다.

전기차 '타이칸' 만든 포르쉐 수장, 주춤하는 폭스바겐 혁신 나선다
블루메 취임 3년째인 2018년 말 포르쉐는 첫 순수 전기 스포츠카 ‘타이칸’을 세상에 내놨다. 1억원을 넘는 고가에도 사전 주문 단계부터 전 세계 수요가 폭발했다. 연간 생산 목표를 2만 대에서 4만 대로 늘리고, 아우디에서 직원 수백 명을 빌려와야 할 정도였다. 지난해 타이칸 판매량은 4만1296대로 정통 스포츠카이자 포르쉐의 상징인 ‘포르쉐 911(3만8464대)’을 제쳤다.

지난 3월 블루메는 203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며 순수 전기차 비중을 전체의 80%까지 늘리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폭스바겐 CEO로 선임되기 직전 포르쉐에서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만들겠다고도 발표했다.

혁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점은 전임자인 디스와 같지만 리더십은 반대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룹의 전기차 사업을 주도한 디스는 지난해 “전기차 전환이 늦어지면 (폭스바겐에서) 일자리 3만 개가 사라질 수 있다”고 말해 노조와 갈등을 빚었다. 반면 블루메는 직원과의 소통을 중요시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포르쉐 CEO로 점찍었던 마티아스 뮐러 전 폭스바겐 CEO는 그를 “팀플레이어”라고 평가했다.

크리스 브라이언트 블룸버그 산업 담당 칼럼니스트는 “블루메는 포르쉐 CEO 시절 타이칸을 출시하며 ‘잘못된 깃털(고용)’을 건드리지 않고 급진적인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며 “폭스바겐 CEO가 된 뒤에도 혁명보다 진화를 선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해결해야 할 그룹 현안 산적

폭스바겐그룹은 매출 기준 자동차 세계 1위다. 그룹의 ‘얼굴’ 폭스바겐과 스코다, 세아트 등 대중적인 브랜드부터 포르쉐, 람보르기니 등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까지 폭넓은 포트폴리오를 자랑한다. 미 경제전문지 포천이 매년 글로벌 주요 기업의 직전 회계연도 매출을 바탕으로 집계하는 ‘글로벌 500’에서 폭스바겐은 올해 8위를 기록했다. 자동차 기업 중 유일하게 상위 10위권에 올랐다.

그러나 판매량은 2020년 도요타에 추월당했다. 올해 상반기 판매량도 400만6000대로 도요타(513만8000대)보다 110만대 이상 적었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 대응에서 도요타에 뒤졌다는 평가다. 전기차 분야에서는 압도적 1위 테슬라와의 격차가 크다. 비야디(BYD) 등 자국 수요의 힘으로 급성장한 중국 기업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린다는 평가다.

다음달 취임하는 블루메가 풀어야 할 과제는 쌓여 있다. 가장 시급한 현안은 그룹 소프트웨어 자회사 ‘카리아드’의 정상화다. 디스 CEO 시절 카리아드에서 전기차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이 지연되면서 그룹의 전기차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유럽 자동차 전문 매체 오토모티브뉴스유럽은 “소프트웨어 문제로 올 4분기 출시될 예정이던 포르쉐 SUV 마칸의 전기차 버전 공개가 미뤄졌고, 아우디의 전기차 개발팀 아르테미스의 전기차 출시 시기도 2025년에서 2027년으로 연기됐다”고 전했다. 이어 “폭스바겐 오너 일가마저 디스 CEO에게 등 돌린 이유는 소프트웨어에 있다”고 강조했다.

핵심 시장인 중국에서의 점유율 회복도 시급하다. 폭스바겐이 지난해 중국에 인도한 차량은 330만 대로 전년보다 14% 감소했다. 상반기는 147만 대로 전년 동기 대비 20% 줄었다. 코로나19 여파와 반도체 공급난 때문이라는 것이 폭스바겐 측 설명이다. 2019년부터 중국 사업을 이끌어 온 스테판 울렌스타인 전 폭스바겐 중국법인 CEO는 지난달 사임을 앞두고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폭스바겐은 2030년께 중국 자동차 판매량이 2800만~3000만 대로 세계 시장의 30~3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한다”며 “폭스바겐이 세계 최고의 자동차 회사가 되려면 반드시 중국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폭스바겐그룹은 올 들어 포르쉐 IPO에 본격 착수했다. 상장을 통해 마련한 실탄을 전기차와 배터리, 자율주행에 투자할 계획이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