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최승호 시인의 우화집 '눈사람 자살사건'을 토대로 한 작곡가 최우정의 합창극 '마지막 눈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관객을 몰입시켰고, 공연 시간 8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국립합창단(단장 겸 예술감독 윤의중)이 '써머 코랄 페스티벌' 공연으로 지난 30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올린 초연작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장르와 양식에 도전해온 최우정은 이번에도 현대음악과 함께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는 일종의 '모노드라마 합창극'을 선보였다.
'마지막 눈사람'은 합창과 오케스트라 음악에 배우의 내레이션을 1인극 형식으로 삽입해 판소리 전통을 현대적으로 적용한 듯한 작품이다.
어조, 표정, 음색, 자세 등이 대본의 의미를 생생하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배우는 단순한 내레이터가 아니고 극을 이끌어가는 연기자다.
전주곡과 12개의 장면, 후주곡으로 구성된 '마지막 눈사람'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폐허가 된 빙하기 지구에 홀로 남은 고층빌딩 위의 눈사람 이야기다.
그의 독백 속에서 관객은 문명의 몰락을 내려다보는 존재의 절망과 고독을 읽는다.
시인의 언어는 절대적인 절망을 이야기하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저버리지 않는다.
마지막 눈사람이 녹아서 사라지고 싶어도 녹지 못하고 눈발이 달라붙는 대로 계속 살이 쪄 뚱보가 되어간다는 설정이 그렇다.
작곡가 역시 '옥상 위 뚱보의 고독'을 강렬하면서도 처연한 금관악기 사운드로 표현한다.
이 작품에서 마지막 눈사람이 처한 상황은 이중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기후변화로 종말을 맞이할지 모를 인류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내용일 수도 있고, 개인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다.
앞의 길을 따랐다면 시의적절하지만 평범해질 위험이 있었다.
작곡가는 창작 합창곡에서 흔히 주제로 쓰이는 '집단주의의 고양'을 버리고 후자의 길을 택했다.
'우~', '아~'로 시작하는 합창의 다섯 음 주제는 마지막 12장에서 솔로 악기의 고요한 마무리로 다시 나타나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지상에는 구원받을 사람이"는 노래로, 그 뒤의 "없다"는 대사로 처리한 부분들도 개인의 고독을 한층 부각시킨다.
초반에 고요하게 진행되다가 갑작스러운 불협화음과 파열음을 내며 자연과 내면의 위기 상황을 표현하는 음악은 현악 트레몰로와 피치카토, 환상적이거나 위협적인 타악기 음색, 합창단원 중 솔리스트들의 출현, 트럼펫의 효과적인 사용 등 다채로운 기법으로 관객을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기계음 같은 차가운 악절과 대조를 이루는 서정적인 부분은 따뜻한 위로를 안겼다.
예술감독 윤의중이 지휘한 서울 비르투오지 챔버 오케스트라는 리듬이 어려운 창작곡을 명료한 테크닉과 풍요로운 해석으로 전달했다.
국립합창단 역시 오케스트라와 깔끔한 호흡으로 조응하며 섬세한 표현력으로 작품 전체의 긴장을 견인했다.
중간에 솔로를 맡은 단원들도 모두 작품의 효과를 높여줬다.
부분적으로 합창 텍스트가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는 대목은 약간 아쉬움을 남겼다.
흰 수트를 입고 흰 소파에 앉아 마지막 눈사람을 연기한 배우 김희원은 이 작품의 드라마를 책임진 탁월한 솔리스트였다.
체념한 듯 고요히 독백을 이어가다가 이따금 폭발하며 절규하는 표현력은 관객에게 절절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9장과 11장의 극단적으로 시니컬한 어조는 10장과 12장의 절망적인 고독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며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렸다.
그래서 관객은 눈사람이 "나는" 하고 잠시 멈췄다가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라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할 때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지구상에 혼자 남은 눈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시인의 언어와 작곡가의 음악을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합창극 속에서 눈사람은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음악 언어에 매여 든든한 꼴을 갖춘 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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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