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첸과 선우예권의 아름다운 '낭만 하모니' [송태형의 현장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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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예술의전당 '슈퍼 듀오' 첫 공연
그리그 2번·풀랑크·프랑크 소나타 등
각 곡의 낭만적 개성 밀도 높게 표현
그리그 2번·풀랑크·프랑크 소나타 등
각 곡의 낭만적 개성 밀도 높게 표현
17년 만에 둘이 함께 연주한다고 했습니다. 올해 33세인 동갑내기 친구들이니 16~17세 청소년기에 악기의 합을 맞춰보고는 처음인 셈입니다. 그런데 본 공연에서 연주할 곡들이 모두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입니다. 두 악기 간 긴 호흡을 요구하는, 연주자 간 오랜 음악적인 교감과 공감이 필요한 장르입니다.
이들은 미국 커티스음악원을 함께 다닌 이후 각각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과 2015년 밴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각 부문에서 손꼽히는 콘서트 연주자로 성장했습니다. 각자 바쁜 연주 일정을 소화하는 두 스타 연주자가 과연 17년이란 긴 세월의 공백을 넘어 좋은 이중주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우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그리 길지 않은 연습 시간이 주어졌을 텐데도 꽤 밀도 높은 앙상블을 이뤄냈습니다. 지난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레이 첸과 선우예권의 ‘슈퍼 듀오 시리즈’ 첫 공연 현장입니다.
레이 첸은 공연 전 인터뷰에서 “우리 둘 다 꽤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며 “우리에게 잘 맞고 각자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작품을 고심해서 선택했다”고 했는데 실제 연주를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이 많은 박수를 받으며 등장했습니다. 1부 연주곡은 그리그의 소나타 2번 G장조와 풀랑크의 소나타입니다. 결은 다르지만, 감정을 진하게 드러내야 하는 낭만적인 선율이 가득한 곡들입니다.
첫 연주곡인 그리그 2번은 전체 조성은 G장조이지만 북유럽 특유의 우울한 비감(悲感)이 지배하는 곡입니다. 피아노의 g단조 리드에 맞춰 비통한 감정을 잔뜩 실은 레이 첸의 느린 선율이 흐릅니다. 선우예권의 왼손이 지휘 역할을 하는 듯했습니다. 평소보다 큰 제스처로 다이내믹(셈여림)과 템포, 리듬을 드러냈습니다. 두 사람의 ‘낭만 하모니’는 2악장 ‘고요한 알레그로’에서 빛났습니다. 쓸쓸하고 슬픈 정조가 배어있는 선율에 각자의 낭만성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참으로 듣기 좋은 하모니를 들려줬습니다. 레이 첸은 선우예권의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볼륨을 정교하게 조절했습니다. 이어지는 곡은 풀랑크가 1차대전에서 접한 파열음에 영감을 받아 구상했다가 1942년에 완성한 바이올린 소나타입니다. 이른바 ’프랑스 6인조‘의 일원으로 모더니즘이 득세하던 당대에는 별로 대접받지 못했던 풀랑크입니다. 하지만 요즘 연주회장에서는 6인조 중 거의 유일하게 연주되는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들도 당대 유행에 따라 불협화음과 다조 음악, 급격한 화성 전환 등이 사용됐지만, 기본적으로 19세기 낭만주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화성과 선율을 담뿍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거칠기는 하지만 현대적인 감성을 입은 낭만적인 작품으로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 종종 무대에 올립니다. 지난 13일 콘서트홀 옆 공연장인 IBK챔버홀에서도 김다미(바이올린)·김규연(피아노) 듀오가 이 곡을 훌륭하게 연주해 청중들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레이 첸과 선우예권도 그랬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2악장에서 두 사람의 낭만적 감성이 도드라졌습니다. 작곡가가 스페인 내전에서 숨진 시인 로르카를 기리며 그의 작품에서 따온 ‘기타는 덧없는 영혼을 울린다’는 부제를 이 악장에 붙였습니다. 아련하고 막막한 비감의 정서가 흐릅니다. 레이 첸은 이 악장을 음색과 표정에 진한 감정을 드러내며 연주했습니다. 여리게 흐르다가 점점 세게 연주하며 절정을 향하는 대목에선 살짝 소름이 돋았습니다. 플랑크 특유의 유머와 장난기가 엿보이는 3악장에서도 마무리에서 약간 어긋나긴 했지만 좋은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공연장이 실내악을 연주하기에는 큰 탓인지, 아니면 제가 앉은 자리가 뒤쪽이어서 그런지 두 곡에서 레이 첸이 여리게 뜯는 피치카토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피치카토와 피아노의 어울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실내악 전용인 IBK챔버홀에 비해 공연장에 울리는 소리의 밀도가 옅은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2부에서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세자르 프랑크의 대표곡인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를 연주했습니다. 베토벤이나 브람스 소나타를 능가할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의 필수이자 단골 레퍼토리입니다. 2년 전 이때쯤 방영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요즘 ‘우영우’로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박은빈(채송아 역)이 대학원 입시곡으로 주제 선율을 자주 들려줘 더 친숙해진 곡입니다.
두 사람도 커티스음악원 재학 시절 함께 연주했던 곡이라고 했습니다. 무난한 연주였습니다. 이 작품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시차를 두고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카논 부분이 많은데,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진지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본 공연에서는 레이 첸이 특유의 엔터테이너적인 기질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을 찾은 많은 레이 첸 팬들이 앙코르 무대를 기대했을 듯싶습니다. 레이 첸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유머러스한 입담과 제스처와 함께 앙코르 공연을 흥겹게 이끌었습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7번과 17번, 하이페츠가 편곡한 퐁세의 에스트렐리타, 몬티의 차르디슈 등 낭만적 소품 연주로 공연이 마무리됐습니다. 이들은 서울 공연에 이어 1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2일 대구 달서아트센터 청룡홀, 3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엽니다. 연주는 반복할수록 깊어지고 좋아지기 마련입니다. 남은 공연에서 두 청년 스타 연주자들의 더 아름다운 ‘낭만 하모니’를 기대해봅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
이들은 미국 커티스음악원을 함께 다닌 이후 각각 2009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바이올린 부문과 2015년 밴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고, 각 부문에서 손꼽히는 콘서트 연주자로 성장했습니다. 각자 바쁜 연주 일정을 소화하는 두 스타 연주자가 과연 17년이란 긴 세월의 공백을 넘어 좋은 이중주를 들려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우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그리 길지 않은 연습 시간이 주어졌을 텐데도 꽤 밀도 높은 앙상블을 이뤄냈습니다. 지난 31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레이 첸과 선우예권의 ‘슈퍼 듀오 시리즈’ 첫 공연 현장입니다.
레이 첸은 공연 전 인터뷰에서 “우리 둘 다 꽤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이라며 “우리에게 잘 맞고 각자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작품을 고심해서 선택했다”고 했는데 실제 연주를 들어보니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검은 정장 차림의 두 사람이 많은 박수를 받으며 등장했습니다. 1부 연주곡은 그리그의 소나타 2번 G장조와 풀랑크의 소나타입니다. 결은 다르지만, 감정을 진하게 드러내야 하는 낭만적인 선율이 가득한 곡들입니다.
첫 연주곡인 그리그 2번은 전체 조성은 G장조이지만 북유럽 특유의 우울한 비감(悲感)이 지배하는 곡입니다. 피아노의 g단조 리드에 맞춰 비통한 감정을 잔뜩 실은 레이 첸의 느린 선율이 흐릅니다. 선우예권의 왼손이 지휘 역할을 하는 듯했습니다. 평소보다 큰 제스처로 다이내믹(셈여림)과 템포, 리듬을 드러냈습니다. 두 사람의 ‘낭만 하모니’는 2악장 ‘고요한 알레그로’에서 빛났습니다. 쓸쓸하고 슬픈 정조가 배어있는 선율에 각자의 낭만성을 한껏 드러내면서도 참으로 듣기 좋은 하모니를 들려줬습니다. 레이 첸은 선우예권의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볼륨을 정교하게 조절했습니다. 이어지는 곡은 풀랑크가 1차대전에서 접한 파열음에 영감을 받아 구상했다가 1942년에 완성한 바이올린 소나타입니다. 이른바 ’프랑스 6인조‘의 일원으로 모더니즘이 득세하던 당대에는 별로 대접받지 못했던 풀랑크입니다. 하지만 요즘 연주회장에서는 6인조 중 거의 유일하게 연주되는 작곡가입니다. 그의 작품들도 당대 유행에 따라 불협화음과 다조 음악, 급격한 화성 전환 등이 사용됐지만, 기본적으로 19세기 낭만주의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화성과 선율을 담뿍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이올린 소나타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거칠기는 하지만 현대적인 감성을 입은 낭만적인 작품으로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 종종 무대에 올립니다. 지난 13일 콘서트홀 옆 공연장인 IBK챔버홀에서도 김다미(바이올린)·김규연(피아노) 듀오가 이 곡을 훌륭하게 연주해 청중들의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레이 첸과 선우예권도 그랬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2악장에서 두 사람의 낭만적 감성이 도드라졌습니다. 작곡가가 스페인 내전에서 숨진 시인 로르카를 기리며 그의 작품에서 따온 ‘기타는 덧없는 영혼을 울린다’는 부제를 이 악장에 붙였습니다. 아련하고 막막한 비감의 정서가 흐릅니다. 레이 첸은 이 악장을 음색과 표정에 진한 감정을 드러내며 연주했습니다. 여리게 흐르다가 점점 세게 연주하며 절정을 향하는 대목에선 살짝 소름이 돋았습니다. 플랑크 특유의 유머와 장난기가 엿보이는 3악장에서도 마무리에서 약간 어긋나긴 했지만 좋은 호흡을 보여줬습니다.
다만 공연장이 실내악을 연주하기에는 큰 탓인지, 아니면 제가 앉은 자리가 뒤쪽이어서 그런지 두 곡에서 레이 첸이 여리게 뜯는 피치카토가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피치카토와 피아노의 어울림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실내악 전용인 IBK챔버홀에 비해 공연장에 울리는 소리의 밀도가 옅은 것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2부에서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세자르 프랑크의 대표곡인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를 연주했습니다. 베토벤이나 브람스 소나타를 능가할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품으로 바이올리니스트의 필수이자 단골 레퍼토리입니다. 2년 전 이때쯤 방영된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요즘 ‘우영우’로 신드롬급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박은빈(채송아 역)이 대학원 입시곡으로 주제 선율을 자주 들려줘 더 친숙해진 곡입니다.
두 사람도 커티스음악원 재학 시절 함께 연주했던 곡이라고 했습니다. 무난한 연주였습니다. 이 작품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시차를 두고 같은 선율을 연주하는 카논 부분이 많은데, 사이좋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주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진지한 소나타를 연주하는 본 공연에서는 레이 첸이 특유의 엔터테이너적인 기질을 발휘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연장을 찾은 많은 레이 첸 팬들이 앙코르 무대를 기대했을 듯싶습니다. 레이 첸은 이런 기대에 부응하듯 유머러스한 입담과 제스처와 함께 앙코르 공연을 흥겹게 이끌었습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7번과 17번, 하이페츠가 편곡한 퐁세의 에스트렐리타, 몬티의 차르디슈 등 낭만적 소품 연주로 공연이 마무리됐습니다. 이들은 서울 공연에 이어 1일 대전예술의전당 아트홀, 2일 대구 달서아트센터 청룡홀, 3일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엽니다. 연주는 반복할수록 깊어지고 좋아지기 마련입니다. 남은 공연에서 두 청년 스타 연주자들의 더 아름다운 ‘낭만 하모니’를 기대해봅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