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우리가 불 속에서 깨달아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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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구조주의에 쉽게 포획되고
이념이 문화·유행으로 변환돼
'주사파적 대중' '386적 대중' 성립
취향이 된 과거가 현실 지배하고
시대가 대중을 '가스라이팅'해
추억의 노예상태 벗어나려면
'정치적 실존주의자'로서
미혹·무명 제거해야
이응준 시인·소설가
이념이 문화·유행으로 변환돼
'주사파적 대중' '386적 대중' 성립
취향이 된 과거가 현실 지배하고
시대가 대중을 '가스라이팅'해
추억의 노예상태 벗어나려면
'정치적 실존주의자'로서
미혹·무명 제거해야
이응준 시인·소설가
소란한 술집에서 내가 마주앉은 친구에게 “달나라”라는 단어가 있는 문장을 내뱉으면, 부근 자리 일면식 없는 누군가가 그걸 ‘무의식중’에 듣고 “달나라”를 넣어 자기 얘기를 한다. 더 우연이기 힘든 단어, “돈키호테”가 있는 문장을 말해도 또 다른 자리 누군가가 제 일행에게 역시 그런다. 이렇게 언어가 전염병처럼 옮겨가 ‘자생번식’하는 걸 경험한 사람이 적잖을 것이고, 나는 섬뜩하다. ‘구조주의(structuralism)’가 두려워서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명제 “타인은 지옥이다”를 ‘극도로’ 쉽게 각색한다면, “인간들 참 내 맘 같지 않네”가 된다. 마찬가지라면, 구조주의란 “인간은 세상(구조)에 휩쓸려갈 뿐이다”일 것이다. 무의미한 삶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의미를 쟁취하자는 실존주의와는 정반대다. 구조주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마르크스 이후 인간 주체는 역사의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는 걸 밝혀냈다”라고 적시했다. 인간은 처벌받는 죄인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환자’라는 소리다.
사회과학적 용어로는 ‘586’이 아니라 ‘386’이 맞다. 예컨대, 386적 인간은 60·70대도 있고 30·40대도 있으니까. ‘386운동권 권력집단’을 비판하는 보고서가 많았다. ‘조선 양반 노론 탈레반’으로 규정하는 견해가 주조였다. 그러나 ‘386적 대중’이 어떻게 성립 유지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개량한복아저씨가 25㎝ 과도(果刀)로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를 공격했을 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처럼 운동권들도 사회문제가 돼버렸다는 정도로만 생각한 내가 미진했다. 조금 뒤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실제로 지배했고, 대중은 자신이 ‘주사파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386의 대부분은 자신이 386과는 다르다고 착각한다. 어떤 당대의 악과 적대관계에 있는 한 집단은 제 ‘본색’을 가리고 로큰롤의 뉘앙스를 가지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한민전방송,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한국전쟁의 기원> 등도 진위(眞僞)에 상관없이 그렇다. 이 불온한 매력은 ‘문화’가 돼 ‘스미고’ 추억으로 변환, 유전자화된다. 이념은 허상이고 ‘유행’이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시대도 참모습을 파악하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개인의 삶을 되짚어보듯 그게 정말 사실이었는지, 가치가 있었는지, 변질과 타락이 있는지 등을 검사해봐야 하지만, 판단이 아니라 ‘취향’이 돼버린 과거보다 힘이 센 현실은 없다. 사람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 귀속감을 선호하는 영적인 존재다. 최고의 최면술사는 정치인이 아니다. ‘시대’다. 시대가 대중을 가스라이팅한다. 인간은 불 속에서 구워져, 변하면 부서지는 도자기인가? 인공부화된 새끼오리들이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니는 ‘각인(imprinting)’이 한 세대 이상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기존의 파시즘 이론으로는 이 ‘추억의 노예 상태’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갱신하지 않는 인간은 타인의 노예가 되고, 자신의 과거의 노예가 된다. 각각의 시대마다 계몽은 절실하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공부’다. 정직과 용기이며 ‘치유’다. 인생과 세상은 하나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기에 구조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한들 각자 ‘정치적 실존주의자’로서 미혹(迷惑)과 무명(無明)을 제거해야 한다.
소설 취재로 앵벌이 포주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물었다. “앵벌이들이 도망치지는 않나?” “도망치지 않는다”. 분명, 도망 ‘못 친다’가 아니라 도망 ‘안 친다’라고 대답했더랬다. 내가 다시 물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도망 못 간다고 생각하나?” 이 질문에 답하던 그자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모르겠는데?” 남의 단어를 받아서 열정적으로 떠들어대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식의 일들이 우리 삶에는, 이 사회에서는 이 순간에도 얼마나 일어나고 있을까?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던 알튀세르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사랑하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감금 상태에서 죽었다. 우리는 깨지는 도자기가 아니라, 깨달아서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자유인이다. 지나간 한 시대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의 포주 노릇을 하고 있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명제 “타인은 지옥이다”를 ‘극도로’ 쉽게 각색한다면, “인간들 참 내 맘 같지 않네”가 된다. 마찬가지라면, 구조주의란 “인간은 세상(구조)에 휩쓸려갈 뿐이다”일 것이다. 무의미한 삶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의미를 쟁취하자는 실존주의와는 정반대다. 구조주의 철학자 알튀세르는 “코페르니쿠스 이후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마르크스 이후 인간 주체는 역사의 중심이 아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는 걸 밝혀냈다”라고 적시했다. 인간은 처벌받는 죄인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할 ‘환자’라는 소리다.
사회과학적 용어로는 ‘586’이 아니라 ‘386’이 맞다. 예컨대, 386적 인간은 60·70대도 있고 30·40대도 있으니까. ‘386운동권 권력집단’을 비판하는 보고서가 많았다. ‘조선 양반 노론 탈레반’으로 규정하는 견해가 주조였다. 그러나 ‘386적 대중’이 어떻게 성립 유지되는지는 관심이 없었다. 개량한복아저씨가 25㎝ 과도(果刀)로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를 공격했을 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처럼 운동권들도 사회문제가 돼버렸다는 정도로만 생각한 내가 미진했다. 조금 뒤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실제로 지배했고, 대중은 자신이 ‘주사파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386의 대부분은 자신이 386과는 다르다고 착각한다. 어떤 당대의 악과 적대관계에 있는 한 집단은 제 ‘본색’을 가리고 로큰롤의 뉘앙스를 가지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한민전방송,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환시대의 논리>, <한국전쟁의 기원> 등도 진위(眞僞)에 상관없이 그렇다. 이 불온한 매력은 ‘문화’가 돼 ‘스미고’ 추억으로 변환, 유전자화된다. 이념은 허상이고 ‘유행’이 실체가 되는 것이다.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 것처럼 시대도 참모습을 파악하려면 세월이 필요하다. 개인의 삶을 되짚어보듯 그게 정말 사실이었는지, 가치가 있었는지, 변질과 타락이 있는지 등을 검사해봐야 하지만, 판단이 아니라 ‘취향’이 돼버린 과거보다 힘이 센 현실은 없다. 사람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 귀속감을 선호하는 영적인 존재다. 최고의 최면술사는 정치인이 아니다. ‘시대’다. 시대가 대중을 가스라이팅한다. 인간은 불 속에서 구워져, 변하면 부서지는 도자기인가? 인공부화된 새끼오리들이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니는 ‘각인(imprinting)’이 한 세대 이상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기존의 파시즘 이론으로는 이 ‘추억의 노예 상태’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갱신하지 않는 인간은 타인의 노예가 되고, 자신의 과거의 노예가 된다. 각각의 시대마다 계몽은 절실하다.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변절이 아니라 ‘공부’다. 정직과 용기이며 ‘치유’다. 인생과 세상은 하나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기에 구조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한들 각자 ‘정치적 실존주의자’로서 미혹(迷惑)과 무명(無明)을 제거해야 한다.
소설 취재로 앵벌이 포주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물었다. “앵벌이들이 도망치지는 않나?” “도망치지 않는다”. 분명, 도망 ‘못 친다’가 아니라 도망 ‘안 친다’라고 대답했더랬다. 내가 다시 물었다. “사슬에 묶여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도망 못 간다고 생각하나?” 이 질문에 답하던 그자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모르겠는데?” 남의 단어를 받아서 열정적으로 떠들어대고 있는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식의 일들이 우리 삶에는, 이 사회에서는 이 순간에도 얼마나 일어나고 있을까? 인간 주체에는 중심이 없다던 알튀세르는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사랑하는 아내를 목 졸라 죽이고 감금 상태에서 죽었다. 우리는 깨지는 도자기가 아니라, 깨달아서 생각과 행동이 바뀌는 자유인이다. 지나간 한 시대가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의 포주 노릇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