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장인열전] '생명 간직한 그릇' 만든다…구순의 박재환 옹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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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 받아 6대째 흙과 동거동락, 전국의 고수 찾아다니며 기술 연마
'똥장군' 항아리 해외서도 주목…도시개발로 사라진 가마터 복원 중
계유년(1813년) 어느 날 가재도구만 겨우 챙긴 박예진의 가족이 점촌마을(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로 숨어들었다.
한양에서 관리로 봉직하던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중서 퇴출 당해 도망치듯 이곳을 찾았다.
이 마을에는 이미 천주교 신자와 가족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미호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주변에 옹기의 재료인 점토가 풍부해 여러 명의 옹기장이도 있었다.
이곳 옹기는 전국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유명했다.
박예진은 생계를 위해 옹기를 빚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들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200여 년 옹기 터를 지켜왔다.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 기능보유자인 박재환(90) 옹은 그렇게 6대째 옹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 1일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문의문화재단지 내 옹기전수관에서 만난 박 옹은 자신의 인생과 고락을 함께한 옹기 이야기를 잔잔한 어조로 풀어놨다.
박 옹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옹기 터에서 놀았다.
강제징용 갔던 아버지가 폭약사고로 왼쪽 발목을 잃어 더는 물레질을 못 하게 됐고, 그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열 한 살 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옹기 가마에서 일을 했다.
자신이 만든 옹기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20대 후반 '옹기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장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충북 보은, 경기 용인·안성, 인천 등 전국을 떠돌며 10여 년간 기술을 연마한 뒤 마흔을 앞둔 1971년 청주로 돌아왔다.
그 탓에 그의 다섯 자녀는 태어난 지역이 모두 다르다.
고향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쌀 50가마 값을 치르고 선대들이 일했던 가마를 인수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익힌 기술로 가마를 개량하고 장독, 술독, 쌀 항아리, 약탕관, 콩나물시루 등 손님들이 주문하는 옹기는 뭐든 척척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의 사업도 현대문물에 밀려 큰 위기를 맞았다.
플라스틱과 양은 같은 가볍고 질긴 용기들이 공장에서 쏟아져나오면서 옹기는 서서히 소비자들의 손에서 멀어져갔다.
시대의 굴곡에도 그는 흙을 빚어 옹기를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박 옹은 "옹기는 플라스틱 용기와 다르게 생명을 이어주는 그릇이야. 소금을 옹기 항아리에 100년 담아놔도 변하지 않아. 옹기가 소금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거지. 조상들이 고추장, 된장을 옹기에 담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마음으로 일해야만 제대로 된 옹기가 나와. 세상이 힘들다고 어떻게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해온 일을 관둘 수 있겠어"
그는 그렇게 옹기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힘든 시간을 버텼다.
그러는 사이 웰빙 바람을 타고 다시 옹기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의 집념도 세상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충북도가 2003년 10월 '200년 역사의 가마터와 옹기 기술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며 71세의 그를 옹기장으로 선정했다.
2009년에는 캐나다서 열린 세계무형문화재 작품전에 '똥장군'을 출품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뿌듯하다.
"옛날에 비료가 없을 때 거름으로 쓸 인분을 모아 둔 항아리가 똥장군이야. 외국인의 눈에 얼마나 신기하게 보였겠어. 그 똥장군이 한국을 알린 거지"
2010년 밴쿠버 올림픽 기간에는 캐나다의 한국 대사관에 옹기 작품을 전시했다.
그해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모델로 선정돼 그의 가마에서 엑스포 성화의 첫 불이 밝혀지기도 했다.
옹기 제작은 밑일, 물레작업, 건아일, 가마 4단계로 이뤄진다.
밑일은 옹기를 만드는 흙을 정제하는 것이다.
물레작업은 옹기를 성형하는 과정이다.
박 옹은 점토를 가래떡처럼 만들어 한 단씩 쌓아 올리는 전통적 방식인 타래 기법으로 물레작업을 한다.
그 뒤 겉면에 유약을 바르고 1차 건조하는 건아일을 거친다.
전통 옹기에 쓰이는 유약은 목초를 태운 재와 섞어 사용한다.
그래야 겉이 단순히 윤택만 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면서 투박한 옹기 특유의 색이 나면서 반들반들하다.
옹기 제작에서 가장 힘든 것은 가마의 불을 다루는 일이다.
흙이 견딜 수 있도록 서서히 온도를 높인다.
좋은 옹기를 구워내려면 가마가 1천250도의 열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옹기를 구울 때는 가마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는 "지금은 기계로 온도를 측정하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확인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어. 평생을 가마에서 살다 보니 이제 불꽃만 봐도 가마의 온도를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생한 옹기는 밥상, 부엌, 장독대 등에서 서민의 애환을 담는다.
잔뜩 멋을 낸 도자기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사람의 삶과 함께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구순(九旬)인 그의 마지막 바람은 옹기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어렸을 때 흙냄새가 싫다던 셋째 아들 성일(59) 씨가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옹기장 이수자의 길을 택하면서 한시름을 놓았다.
7대째 가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200여 년 전 지어져 그와 평생을 함께했던 오송읍 봉산리의 가마는 지금 사진으로만 남았다.
2017년 오송생명과학단지가 개발되면서 강제 철거돼서다.
당시 그의 가마는 제11회 한국내셔널트러스터 보전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개발사업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박 옹은 이후 작업장을 현재의 문의문화재단지 옹기전수관으로 옮겼다.
선대의 땀이 배어있는 가마가 없어졌다는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는 봉산리 인근의 정중리에 가마를 다시 꾸미기로 하면서 그나마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내년부터 가마를 짓고 새로운 작업장 만들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흙을 다듬고, 구워 새롭게 탄생하는 옹기를 보면 그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아. 인생의 마지막까지 물레를 돌리고, 가마를 지키고 싶어"
장인의 말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한결같이 우리의 곁에 있는 투박한 옹기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하다.
/연합뉴스
'똥장군' 항아리 해외서도 주목…도시개발로 사라진 가마터 복원 중
계유년(1813년) 어느 날 가재도구만 겨우 챙긴 박예진의 가족이 점촌마을(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로 숨어들었다.
한양에서 관리로 봉직하던 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중서 퇴출 당해 도망치듯 이곳을 찾았다.
이 마을에는 이미 천주교 신자와 가족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미호강을 끼고 있는 이곳은 주변에 옹기의 재료인 점토가 풍부해 여러 명의 옹기장이도 있었다.
이곳 옹기는 전국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유명했다.
박예진은 생계를 위해 옹기를 빚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아들의 아들들이 대를 이어 200여 년 옹기 터를 지켜왔다.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옹기장 기능보유자인 박재환(90) 옹은 그렇게 6대째 옹기를 만들고 있다.
지난 1일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문의문화재단지 내 옹기전수관에서 만난 박 옹은 자신의 인생과 고락을 함께한 옹기 이야기를 잔잔한 어조로 풀어놨다.
박 옹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옹기 터에서 놀았다.
강제징용 갔던 아버지가 폭약사고로 왼쪽 발목을 잃어 더는 물레질을 못 하게 됐고, 그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열 한 살 나던 해부터 본격적으로 옹기 가마에서 일을 했다.
자신이 만든 옹기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20대 후반 '옹기 고수'들을 찾아 나섰다.
장인의 길로 접어들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충북 보은, 경기 용인·안성, 인천 등 전국을 떠돌며 10여 년간 기술을 연마한 뒤 마흔을 앞둔 1971년 청주로 돌아왔다.
그 탓에 그의 다섯 자녀는 태어난 지역이 모두 다르다.
고향에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쌀 50가마 값을 치르고 선대들이 일했던 가마를 인수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익힌 기술로 가마를 개량하고 장독, 술독, 쌀 항아리, 약탕관, 콩나물시루 등 손님들이 주문하는 옹기는 뭐든 척척 만들어 냈다.
그러면서 명성도 얻었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의 사업도 현대문물에 밀려 큰 위기를 맞았다.
플라스틱과 양은 같은 가볍고 질긴 용기들이 공장에서 쏟아져나오면서 옹기는 서서히 소비자들의 손에서 멀어져갔다.
시대의 굴곡에도 그는 흙을 빚어 옹기를 만드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박 옹은 "옹기는 플라스틱 용기와 다르게 생명을 이어주는 그릇이야. 소금을 옹기 항아리에 100년 담아놔도 변하지 않아. 옹기가 소금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거지. 조상들이 고추장, 된장을 옹기에 담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를 회상했다.
"흙에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마음으로 일해야만 제대로 된 옹기가 나와. 세상이 힘들다고 어떻게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해온 일을 관둘 수 있겠어"
그는 그렇게 옹기 만드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힘든 시간을 버텼다.
그러는 사이 웰빙 바람을 타고 다시 옹기가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의 집념도 세상이 알아보기 시작했다.
충북도가 2003년 10월 '200년 역사의 가마터와 옹기 기술이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다"며 71세의 그를 옹기장으로 선정했다.
2009년에는 캐나다서 열린 세계무형문화재 작품전에 '똥장군'을 출품해 세계 각국으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그는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뿌듯하다.
"옛날에 비료가 없을 때 거름으로 쓸 인분을 모아 둔 항아리가 똥장군이야. 외국인의 눈에 얼마나 신기하게 보였겠어. 그 똥장군이 한국을 알린 거지"
2010년 밴쿠버 올림픽 기간에는 캐나다의 한국 대사관에 옹기 작품을 전시했다.
그해 울산세계옹기문화엑스포 광고모델로 선정돼 그의 가마에서 엑스포 성화의 첫 불이 밝혀지기도 했다.
옹기 제작은 밑일, 물레작업, 건아일, 가마 4단계로 이뤄진다.
밑일은 옹기를 만드는 흙을 정제하는 것이다.
물레작업은 옹기를 성형하는 과정이다.
박 옹은 점토를 가래떡처럼 만들어 한 단씩 쌓아 올리는 전통적 방식인 타래 기법으로 물레작업을 한다.
그 뒤 겉면에 유약을 바르고 1차 건조하는 건아일을 거친다.
전통 옹기에 쓰이는 유약은 목초를 태운 재와 섞어 사용한다.
그래야 겉이 단순히 윤택만 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면서 투박한 옹기 특유의 색이 나면서 반들반들하다.
옹기 제작에서 가장 힘든 것은 가마의 불을 다루는 일이다.
흙이 견딜 수 있도록 서서히 온도를 높인다.
좋은 옹기를 구워내려면 가마가 1천250도의 열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옹기를 구울 때는 가마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는 "지금은 기계로 온도를 측정하지만, 예전에는 사람이 확인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어. 평생을 가마에서 살다 보니 이제 불꽃만 봐도 가마의 온도를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렇게 탄생한 옹기는 밥상, 부엌, 장독대 등에서 서민의 애환을 담는다.
잔뜩 멋을 낸 도자기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사람의 삶과 함께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구순(九旬)인 그의 마지막 바람은 옹기의 대를 이어가는 것이다.
어렸을 때 흙냄새가 싫다던 셋째 아들 성일(59) 씨가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옹기장 이수자의 길을 택하면서 한시름을 놓았다.
7대째 가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200여 년 전 지어져 그와 평생을 함께했던 오송읍 봉산리의 가마는 지금 사진으로만 남았다.
2017년 오송생명과학단지가 개발되면서 강제 철거돼서다.
당시 그의 가마는 제11회 한국내셔널트러스터 보전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개발사업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박 옹은 이후 작업장을 현재의 문의문화재단지 옹기전수관으로 옮겼다.
선대의 땀이 배어있는 가마가 없어졌다는 생각만 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그는 봉산리 인근의 정중리에 가마를 다시 꾸미기로 하면서 그나마 헛헛한 마음을 달래고 있다.
내년부터 가마를 짓고 새로운 작업장 만들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흙을 다듬고, 구워 새롭게 탄생하는 옹기를 보면 그 속에 내가 있는 것 같아. 인생의 마지막까지 물레를 돌리고, 가마를 지키고 싶어"
장인의 말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한결같이 우리의 곁에 있는 투박한 옹기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