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이션 위기에 직면한 영국을 이끌 새 총리가 5일(현지시간) 결정된다.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과 리시 수낙 전 영국 재무장관 중 영국의 제 78대 총리가 탄생한다. 신임 총리는 두 자릿수 물가상승률과 에너지 공급난을 잡는 동시에 국제사회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하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새 총리, 누가 되든 경기침체 국면 맞이할 듯


5일 오후(현지시간) 영국 보수당은 새 대표 선출 투표의 결과를 발표한다. 지난 2개월 간의 경쟁을 거쳐 최종 후보로 꼽힌 트러스 장관과 수낙 전 장관 등 2인이 최종 후보로 남았다. 영국 보수당원 약 16만명은 지난달 1일부터 3일까지 한 달여 간 우편, 인터넷 등으로 신임 당 대표를 투표했다. 보수당 선거관리위원회는 4일 개표 결과를 확인했다. 투표 결과가 나오면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사임하고 신임 총리가 새 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영국은 의원내각제여서 제 1당의 대표가 총리직을 맡는다

총리 자리에 가장 가까운 건 트러스 장관이다. 지난달 초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에 따르면 트러스 장관에 대한 보수당원들의 지지율은 60%로 수낙 전 장관(26%)의 두 배를 웃돌았다. 이번 투표 대상도 보수당원으로 한정된 만큼 이변이 없는 한 트러스 장관의 승리가 유력하다. 트러스 장관이 총리가 되면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1979~1990년 재임), 테리사 메이(2016~2019년)에 이어 세 번째 여성 총리가 나온다. 40대 여성 총리로는 유일하다. 수낙 전 장관이 승부를 뒤집으면 사상 첫 인도계 총리가 탄생한다.

신임 총리는 경기침체 탈출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영국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경기침체가 올 4분기부터 2024년까지 계속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경제 위상도 예전 같지 않다. 5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영국의 지난 1분기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8160억달러(약 1119조원)으로 집계됐다. 한때 식민 지배를 했던 인도(8547억달러)에 세계 5위 경제 대국 지위를 내줬다.

영국의 물가상승률은 1982년 2월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지난 7월 물가상승률이 전년 동기 대비 10.1%를 기록했다. 골드만삭스는 내년 이 상승률이 22%에 달할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 차단으로 야기된 에너지 공급난도 문제다. 런던ICE거래소에 따르면 지난달 26일 영국 천연가스 선물(10월물) 가격은 섬(열량단위)당 702.95펜스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트러스, 감세·성장 기조 속 외교 강경책 뚜렷


트러스 장관은 적극적인 감세와 성장 위주 정책으로 보수색이 뚜렷한 정치인으로 여겨진다. ‘철혈 재상’으로 불린 대처 전 총리가 그의 롤모델이다. 국민보험료·법인세 인상 반대, 환경부담금 과세 중단 등이 트러스 장관이 내건 감세책의 골자다. 소득 재분배보다는 경제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지도 분명하다. 트러스 장관은 4일 BBC와의 인터뷰에서 국민보험료 인상 반대 이유를 말할 때 “최고 소득자에게 최빈자보다 250배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은 공정하다”며 “모든 경제 정책을 ‘재분배의 렌즈’로 보는 건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0년간 영국의 저성장이 분배에 초점을 둔 탓이라는 얘기다.

외교 정책에서는 강경 노선을 내세우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러시아, 중국뿐 아니라 오랜 동맹인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예외는 없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트러스 장관은 지난해 9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만났을 때 “영·미 관계가 특별하다는 윈스턴 처칠의 표현은 이제 옛말”이라며 “영·미 간 철강 관세 분쟁도 있으니 일본, 캐나, 멕시코랑 무역하는 게 훨씬 낫다”고 말했다. 미국 싱크탱크인 헤리티지재단의 나일 가디너 마거릿대처자유센터장은 “트루스 장관은 보리스 존슨 전 영국 총리보다 바이든 행정부에 맞서는 데 더 적극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러스 장관은 브렉시트도 적극 옹호하며 EU와 거리를 두고 있다. 브렉시트 당시 EU와 맺었던 협약인 북아일랜드 의정서의 수정을 강행하면서 EU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EU는 차기 영국 총리를 다음 달 6일 체코 프라하에서 열릴 유럽 정상회의에 초청할 계획이다. EU 국가들과 영국, 우크라이나, 몰도바 등을 아우른 유럽정치공동체를 만드는 안이 이 회의에서 논의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트러스 장관은 올 초 당내 경선에서 “영국의 초점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주장하는 기구(유럽정치공동체)가 아니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G7에 있다”고 밝힌 상태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