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스테이지 드라마' 형식의 발레극
예술과 무대 향한 무용수 열정 표현

공연 전부터 막을 열어 놓고, 배우들이 미리 등장해 무언가 하다가 자연스럽게 극을 시작하는 것은 연극 무대에선 자주 볼 수 있는 기법입니다. 극의 시작과 끝을 꽉 닫아놓는 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나 행위가 이전부터 시작해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는 수법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주제 중 하나인 ‘발레 무용수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끝없이 반복하는 연습’과 맞아떨어지기도 합니다.
이런 공연 형태를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뼈대는 연극입니다. 발레 공연으론 이례적으로 대사가 등장합니다. 무대에서 무용수가 소리를 내거나 독백을 하는 게 아니라, 극 중 발레 마스터 한 명에 한정된 얘기이긴 하지만 아예 연극처럼 연기를 하며 대사를 상당히 길게 하는 공연을 저는 처음 봤습니다.

백스테이지를 다룬 뮤지컬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플롯입니다.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봤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조입니다. 다만 중간의 공연이 훨씬 사실적이고 비중이 높죠. 그렇다고 발레를 다룬 본격적인 연극이라고 보기에는 스토리나 플롯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느슨합니다. ‘주역이 다쳐 무산될 뻔한 공연을 재능있고 꾸준히 노력해온 신인이 대신해 구한다’는 판에 박힌 설정이 어설프게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런 약한 드라마성이 공연에 그리 약점이 되지는 않습니다. 연극의 형태를 띠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공연이 방점을 두는 것은 현실입니다. 드라마는 현실을 보다 재미있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끊어지지 않게 끊어지지 않게 모짜렐라 치즈처럼 쭉쭉 늘리면서~” “왼쪽에 있는 사람이 앞으로 지나가는 거 아직도 몰라요? 이건 기본이에요.” “우리 발레단 자랑 칼군무라는 얘기 많이 들었죠? 줄 맞추는데, 앞뒤 좌우 옆 사이 좀 더 신경쓰세요” 등 마스터의 말들이 재미있습니다. 아마도 실제 연습 현장에서 나왔을 법한 말들입니다. “우리 발레단 자랑 칼군무~” 할 때는 살짝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극 중 발레단이 어느 발레단을 모델로 하는지 다 알 텐데 이렇게 극중 대사로 다시 발레단 자랑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말이죠. 이런 사실적인 대사들의 재미도 쏠쏠합니다.
본격적인 공연에 넘어가기에 앞서 무대를 전환하는 시간 동안 공연장을 향하는 여러 관객의 대화 장면과 사막(반투명막)을 깔고 보여주는 무대 뒤 분장실과 대기실 모습이 나옵니다. 대화는 작위적인 느낌이 쏠쏠 풍기는데 그게 오히려 재미를 줍니다.

‘맥도웰의 피아노 협주곡 2인무’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랩소디’ ‘쇼팽의 피아노 스케르초 2인무’ ‘미리내길’ ‘비연’ 등 다섯 편의 ‘신고전 발레’ 작품이 연속해서 펼쳐졌습니다. 연극이 아니라 수준 높은 발레를 보러온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킬 만한 호연이었습니다. ‘더 발레리나’ 전체를 안무하고 연출한 유병헌 유니버설발레단 예술감독의 기존 발표작들이라고 했습니다. 문 단장의 해설대로 발레에는 ‘백조의 호수’ 같은 고전발레, ‘지젤’ 같은 낭만 발레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발레의 아름다운 선이 현대무용의 자유로운 표현과 한국무용의 우아하고 정제된 곡선과 만나 어떻게 신고전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빚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무대였습니다.

공연은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끝이 납니다. 이 발레단의 대표 공연 중 하나인 ‘호두까기 인형’을 올해는 50회나 한다는 단원들의 푸념이 결국은 교훈적인 다짐으로 끝나는 대사도 재미납니다. ‘이렇게도 재치 있게 홍보할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물론 한 공연이 올려지기까지의 ‘애환’을 극적으로 다루는 백스테이지 드라마에 비해 슬픈 ‘애(哀)’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전반적으로 사실보다 조금은 미화한 느낌이 듭니다. 드라마만 따지면 전반부에 주역 대신 ‘대타’가 된 신입이 후반부 갈라 공연 중 한 편에는 출연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발레의 백스테이지 세계와 예술과 무대를 향한 무용수들의 열정과 애환, 노력을 꽤나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발레를 잘 모르는 분들도 재미있게 배우면서 즐길 수 있는 공연입니다.
이 작품은 ‘문예회관과 함께하는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에 선정돼 유니버설발레단과 지역 문예회관 다섯 곳이 함께 제작했습니다. 하남문화예술회관과 군포문화예술회관,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에 이어 오는 16일과 17일 경북 영덕군 예주문화예술회관과 23일과 24일 경남 진주시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공연합니다.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