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높이 파도, 집 집어삼켜"…태풍 길목, 긴박했던 주민들 가슴 쓸어내려
대송·동해면 등 하천 역류하며 마을 물 폭탄…이재민 속출
범람 칠성천 주변 주민 "도랑 개설 등 민원했지만 묵살…인재"
[르포] 짙푸르던 포항 바다, 흙탕물 됐다…주민 "이런 태풍 처음"
"아버지가 90년을 사셨는데 이런 태풍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
경북 포항 남구 흥환리(호미로)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정종원(57)씨는 6일 오전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불과 3시간 전, 태풍이 다가왔던 순간을 떠올렸다.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집채만 한 파도를 일으키며 생계 터전을 덮친 건 이날 오전 8시쯤.
이른 새벽부터 태풍 길목에 놓였던 경북 포항에는 시간당 110㎜ 이르는 폭우가 쏟아졌다.

300m가량 떨어진 정자 근처에 정박한 소형 보트가 침수된 도로 위 물길을 따라 떠내려와 가게 앞 담벼락에 부딪히며 재난이 시작됐다고 한다.

일대 도로는 순식간에 성인 허리 높이만큼 물이 차올랐다.

태풍이 빠져나가고 비가 그친 지 1시간여 만에 마을을 삼킨 물이 빠져나갔고, 어업용 그물망 등 생계용 물품들도 함께 떠내려갔다.

정씨 아내는 "지붕 높이 파도가 집을 집어삼켰다"며 "2층 베란다 유리가 산산이 조각나고, 수도와 전기가 다 끊겼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재난 영화 1편을 찍었다"라며 "비가 2시간만 더 왔으면 인명 피해가 크게 났을 거 같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르포] 짙푸르던 포항 바다, 흙탕물 됐다…주민 "이런 태풍 처음"
이날 오전 2시 50분께 포항 남구 대송면 주민들은 범람하는 칠성천을 바라보며 긴장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이재민들은 인근 면사무소, 교회, 다목적회관 등에서 꼬박 날밤을 지새우고, 동이 트자마자 침수된 집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진흙탕에 몸을 담갔다.

김민수(84) 할머니는 "태풍 매미 때도 (칠성천이) 넘치기는 했는데 이렇게 집까지 침수되지는 않았다"라며 "복지관에 대피하고 집에 가보려고 하니 물로 가득 차 갈 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장화 안에 가득 찬 물을 빼보며 애써 눈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르포] 짙푸르던 포항 바다, 흙탕물 됐다…주민 "이런 태풍 처음"
이를 지켜보던 한 남성은 "다들 이렇게 침수될까 봐 남성교 주변에 쌓인 쓰레기를 치우거나, 도랑을 밑에 하나 내달라고 그렇게 요청했는데 묵살했다"며 "칠성천하고 길이 수위가 같으니 당연히 배수가 안 되지 않느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민 성모(69) 씨는 "막판까지 칠성천 물이 동네 저지대로 넘치지 않게 하려고, 주민들이 둑 주변에 제방을 쌓았는데 속수무책이었다"며 "마냥 치우며 기다리고 있긴 한데, 인재라는 생각에 화가 가시질 않는다"고 전했다.

[르포] 짙푸르던 포항 바다, 흙탕물 됐다…주민 "이런 태풍 처음"
단시간에 포항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힌남노는 큰 피해를 남겼다.

평소 짙푸르던 포항 바다는 이날 오전 내내 갈색 흙탕물이 되어 매섭게 출렁거렸다.

도로 곳곳마다 침수가 되거나, 작은 산사태가 발생해 차량 통행이 어려웠다.

그나마 복구에 해병대 장병들이 속속 동원돼 힘을 보태주고 있다.

남구 동해면 금광리는 도랑이 막힌 탓에 하천이 역류해 마을이 수해를 입었다.

오가는 통행로가 꽉 막혀 일부 주민만이 자체 복구에 나서는 것이 전부인 실정이었다.

이마트 포항점을 비롯해 일부 편의점 역시 침수로 이날 영업을 중단했다.

대구지방기상청에 따르면 4일 0시부터 6일 오전 11시까지 누적 강수량은 포항 393㎜다.

경북에 발령된 태풍주의보는 이날 오후 1시부로 해제되고, 폭풍해일주의보와 풍랑특보 등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르포] 짙푸르던 포항 바다, 흙탕물 됐다…주민 "이런 태풍 처음"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