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金井)의 찬 기운 벽오동 감싸는데
물 긷는 소리 끊기고 까마귀는 울며 간다.
이제야 알겠네, 해 지고 별 뜨는 즈음
황혼의 시각 보내기 새삼 어려운 줄.
金井寒煙鎖碧梧 轆轤聲斷度啼烏
偏知日沒星生際 銷得黃昏一刻殊
* 정약용(丁若鏞·1762~1836) : 조선 후기 시인, 학자.
------------------------------------------ 다산 정약용이 1794년 8월 5일 밤 죽란(竹欄)에 앉아 쓴 시입니다. 죽란은 다산이 살았던 서울 명례방 집의 정원 이름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문인들과 어울려 자주 시회를 가졌죠. 유명한 죽란시사(竹欄詩社)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추심(秋心)’이라는 제목의 5수 연작 중 두 번째로 실려 있지요.
이 시 쓴 다음 해 금정으로 좌천당해
다산이 이 시를 쓸 때 곁에는 남고(南皐) 윤규범(尹奎範·1752~1821)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산의 육촌 형으로 26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시문으로 이름이 난 인물이지요. 다산과 자주 어울려 시를 지었는데 특히 이 시를 극찬했다고 합니다.시정이 쓸쓸하고 가을날 황혼의 정치가 함께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주는 시입니다. 다산이 이 시에 쓴 금정(金井)은 궁궐이나 정원에 있는 우물을 미화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다산이 이 시를 쓴 다음 해인 1795년 7월에 주문모 사건에 연루돼 좌천당해 간 곳이 바로 충청도 금정이었으니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역참 누각 앞에 벽오동 한 그루가 서 있었다고 하니 더욱 놀랍지요.
어쨌거나 금정 찰방으로 쫓겨간 이래 다산은 황혼의 시각이 가장 괴로웠다고 고백합니다. 세상만사가 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지요.
‘방금 뜬 초승달이 발을 더디 지나간다’
그래서 시 제목을 ‘금정시참(金井詩讖)’이라 했는데, 자신이 금정이란 곳에 찰방으로 가서 황혼 무렵에 여러 가지 복잡한 심사로 괴로워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대가의 경지는 정말 다른가 보죠.금정에 도착해서 감회가 남달랐을 다산은 곧 자신의 시에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가을바람 벽오동 가지에 불어오니/ 금정 난간머리에 해 저물 때로다/ 잠시 역루에서 한 잔 술에 취했거니/ 방금 뜬 초승달이 발을 더디 지나간다(秋風吹入碧梧枝, 金井欄頭日暮時, 暫就驛樓成薄醉, 一彎新月度簾遲).’
다산의 심정이 어땠는지 짐작할 만하지요. 그는 벽오동 가지에 불어오는 가을바람 앞에서 저무는 낙조 같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한 잔 술에 취했다고 썼습니다. 얼마나 쓸쓸했으면 방금 뜬 초승달이 발도 더디 지나간다고 읊었을까요.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