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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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좋아하시나요? 좋은 사람과 흥겹게 마시는 술 한잔은 인생을 향기롭게 만듭니다. 슬픈 일을 겪은 친구에게 우리는 겨우 이런 위로를 건네죠. "내가 술 사줄게. 지금 나와."

술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함께 한 오래된 벗입니다. 이규보, 서거정, 김시습, 조조, 도연명… 글 잘 쓴다고 소문난 옛 문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죠. 최근 출간된 책 <주시 일백수>는 한·중국 대표 시인들의 '술술 읽히는' 술에 관한 한시 114수를 모은 책입니다.

송재소 퇴계학연구원장이 한시를 우리 말로 풀었습니다. 한국한문학회장을 지내고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한시 전문가죠. 한시뿐 아니라 술에도 일가견이 있습니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이 팔십이 된 지금도 매일 소주 한병 정도를 마시고 있으니 우리의 우정이 돈독하지 않은가? 죽는 날까지 이 우정을 유지하고 싶은데 반갑지 않은 방해꾼이 우정을 깰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부록으로 실은 '중국의 술' 설명만 봐도 그의 술 사랑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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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관한 옛 시를 보다 보면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는 술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너 이제 어린 나이에 술잔을 기울이니
조만간 창자가 썩을까 두려워라
네 아비 늘 취한 것 배우지 마라
한평생 남들이 미치광이라 말한단다

한평생 몸 망친 게 모두가 술 탓인데
네가 술 좋아하니 이를 또 어이할꼬
삼백이라 이름 지은 것 이제야 후회하니
날마다 삼백 잔을 마실까 두렵구나

- 이규보, '아들 삼백이 술을 마시기에'

'삼백(三百)'은 이규보 아들의 어린 시절 이름이에요. 이규보는 1195년에 삼백운, 즉 운(韻)이 삼백번이나 들어가는, 길고 긴 시를 지었는데 이 시를 완성한 날 아들이 태어났거든요. 아마 아들도 자기처럼 글깨나 쓰는 인물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런 이름을 붙여줬겠죠.

그런데 웬 걸.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기는커녕 술만 마시는 아들을 보니 아버지 이규보는 속이 상합니다. 아들을 위해 쓴 시에 애정 어린 잔소리와 장난스러운 타박을 담았죠.

한가위, 가족들과 정답게 술잔을 기울이며 시 한 수를 곁들인다면 술자리는 더 근사해질 겁니다. 이런 구절은 어떨까요. "깊어 가는 맑은 밤 술잔을 기울이니/ 등잔 앞엔 가랑비, 처마엔 꽃이 지네" (두보의 '취시가' 중에서)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술도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적당히 마시면 흥취를 돋우기에는 제 격이죠.

중국 청나라 문인 오교는 산문과 시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산문은 쌀로 밥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시는 쌀로 술을 빚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밥은 쌀의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술은 쌀의 형태와 성질이 완전히 변한다." 어떤 시들은 언어로 지었어도 언어 너머의 풍경을 보여준다는 의미죠.

가을 밤, 보름달 아래 술 한잔, 시 한 수 즐기는 순간은 추석 연휴를 완전히 다른 근사한 풍경으로 바꿔놓을 지도 모릅니다. 마치 쌀로 빚은 훌륭한 술처럼요.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