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열다섯 번째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를 출간한 문정희 시인. /구은서 기자
최근 열다섯 번째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를 출간한 문정희 시인. /구은서 기자
"유랑이 나의 주소"라고 시인 문정희는 시 '어린 떠돌이'에서 말했다. 이 시가 실린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의 출간을 기념해 만난 그는 "전남 보성 조그만 마을의 소녀였던 저는 11살때부터 부모 품을 떠나 유학을 했다"며 "지금도 어느 역에 가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는 "인생이 유랑, 방랑 같다"고도 했다.

어린 시절 기억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이 서 있는 곳은 어디든 망명지"('아도니스')다. 효율과 쓸모가 가장 중요한 세상. 시와 시인이 정주할 자리는 없다. 시인은 "썩은 나뭇가지에 앉아 우는/희귀종 새처럼"('희귀종') 절망 또는 희망을 노래한다.

10대에 첫 시집을 낸 문 시인은 "등단 이후 53년간 한국 사회는 오직 물질 가치와 속도전에 매달렸다"며 "그 두 가지와 전혀 무관한 일(시 쓰는 일)을 붙들고 있다는 데 때로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대가 급변하는데, 시가 무능한 것 같은 순간도 있었죠. 왜 없었겠어요. 사랑하는 자식도 코를 콱 꼬집고 싶을 때도 있듯이, '시가 뭐라고 내 삶에 이렇게 관여하나' 했죠. 그래도 제게는 시를 쓰는 순간이 제일 편하고 좋았어요. 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죠."
요즘 시인 문정희는 침대맡에 '이 책'을 둔다 [작가의 책갈피]
유랑, 방랑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떠났던 시인처럼 그의 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10개 언어로 번역돼 전 세계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문 시인은 코로나19 전까지만 해도 해외 독자들과 자주 마주하고 시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열다섯 번째 시집 <오늘은 좀 추운 사랑도 좋아>에는 프랑스 파리, 중국 난징 등 해외에서 쓰인 시가 담겨 있다.

방랑자를 자처하는 문 시인이 요새 '꽂혀 있는' 책도 방랑에 대한 책들이다. 그는 "유랑은 현실에 대한 불만족과 불안이 출발의 근거인데, 문학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문 시인이 "그저께 사서, 어제 밤에 읽다 잔 책"이라며 추천한 건 베르너 헤이초크가 쓴 <얼음 속을 걷다>. 독일의 영화 감독이자 작가인 저자가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유럽의 겨울을 가로질러' 파리로 향한 여정을 담고 있다. 몽상과 현실이 뒤섞인, 기이하고 아름다운 여행기다.
요즘 시인 문정희는 침대맡에 '이 책'을 둔다 [작가의 책갈피]
소설가 김연수는 이 책 추천사에서 "죽음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나는 책"이라며 "(책 속) 그 남자는 죽음에 맞서 걸었고, 수많은 삶을 목격했고, 그것을 기록했는데 결말은 꿈과 같다"고 했다.
요즘 시인 문정희는 침대맡에 '이 책'을 둔다 [작가의 책갈피]
문 시인은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도 추천 책으로 꼽았다. 이 책은 201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토카르추크의 대표작이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표류 중인 사람들의 사연이 담긴, 짧은 이야기들을 모았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