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탁된 상품이었다"…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
'학대·방치·신원위조' 50년만에 인권침해 고발한 해외입양인들
"텅 빈 책꽂이처럼, 살갗 없이 뼈만 남는 심정입니다.

"
10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덴마크 한국인 진상규명 그룹'(DKRG) 공동대표 피터 뭴러(한국명 홍민) 변호사는 해외 입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박탈당한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에서 덴마크로 입양된 이들이 결성한 이 단체는 1960∼1980년대 입양 당시의 광범위한 인권 침해를 밝혀달라며 지난달 23일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해외 입양인 단체 중 최초로 진실규명을 요구한 DKRG는 오는 13일 진실화해위를 찾아 130여 건의 새로운 사례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한다.

이번에는 덴마크 외에 미국·벨기에·네덜란드 등에 입양된 이들도 동참한다.

뭴러 씨는 지난달 덴마크로 돌아가는 길에 경유지에서 핸드폰을 켰을 때 세계 각지의 입양인들이 200통이 넘는 응원 이메일을 보내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후 빗발치는 제보를 일일이 확인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DKRG에 따르면 니아 토프트에이어 씨는 5세 때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된 채 공항에 도착했다.

덴마크 부부가 이를 보고 자리를 떠 토프트에이어 씨는 며칠간 공항에 방치됐다.

1970년 홀트아동복지회(홀트)에 의해 노르웨이로 입양된 정경숙 씨는 1987년 한국의 자매와 재회하면서 자신이 자발적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버지가 정씨를 병원에 입원시킨 후 다시 가보니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아버지는 딸을 찾아헤매다 끝내 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4년 뒤 눈을 감았다.

'꼭 찾아야 한다'는 유언만 뒤에 남겨졌다.

덴마크 입양인 앤야 필어슨 씨는 44세가 됐을 때 그동안 갖고 있던 입양 서류에 적힌 개인정보가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됐다.

한국사회봉사회(KSS)를 직접 방문했을 때 기록된 내용이 사망한 다른 아동의 것이라는 답을 들은 것이다.

'학대·방치·신원위조' 50년만에 인권침해 고발한 해외입양인들
인터뷰에 동석한 DKRG 회원이자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박사과정 수료생인 한분영 씨는 "8∼12세에 해외로 입양된 여아 중에는 국내 입양기관에서 성적 학대를 당한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뭴러 씨는 "해외 입양인들이 행동에 나선 것은 '복수'가 아니라 진실을 찾기 위해서"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가 진실을 찾아 나선 계기는 자식들이다.

세 딸은 어느 날 뭴러 씨에게 덴마크 할머니와 아빠의 생김새가 다른 이유를 물었다.

아이들은 입양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질문을 쏟아냈다.

뭴러 씨는 그 질문들에 명확한 답을 들려주기 위해 친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정체성을 찾아 나선 해외 입양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DKRG에 따르면 다수의 입양인은 입양 당시 서류에 허위 정보가 기재돼있다.

성인이 돼 입양기관을 다시 찾으면 개인정보에 대한 접근을 불허 당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달 본인도 진실규명을 신청한 뭴러 씨는 홀트에 3차례나 요구한 끝에 자신에 대한 진짜 기록을 받아봤다.

지난 8일 한 주민센터를 찾은 그는 홀트 설명과 달리 1974년이 아니라 1984년에서야 자신의 한국 국적이 취소됐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 기간 주민등록번호는 부여되지 않았다고 해 이유를 묻자 주민센터는 '출생신고가 되지 않아서'라는 황당한 답을 들려줬다.

뭴러 씨는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령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다"며 허탈해했다.

그는 "기록을 위조하면 입양 절차를 간소화하는 데 용이했을 것"이라며 "당시 입양 시스템은 권위주의 정부의 묵인하에 아이들을 '세탁'한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컨베이어벨트였다"고 말했다.

'학대·방치·신원위조' 50년만에 인권침해 고발한 해외입양인들
DKRG는 올해 중으로 홀트와 KSS 등에 입양 기록을 공개하라는 소송을 제기할 계획이다.

뭴러 씨는 "우리를 한 번 상품처럼 팔았다고 우리에 대한 기록마저 사적 소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말했다.

입양인들은 이번 움직임을 계기로 국내 입양기관들이 입양 기록을 파기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에 DKRG는 13일 진실규명을 신청한 뒤 용산 대통령 집무실로 향해 입양 문서 훼손을 막아달라는 내용을 담은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다.

"입양아 문제는 한국의 살아있는 역사이기에 한국밖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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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