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아침 시편] 윔블던 테니스 코트에 새겨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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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모든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비난해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모두가 너를 의심할 때 자신을 믿고
그들의 의심마저 감싸 안을 수 있다면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
속임을 당하고도 거짓과 거래하지 않고
미움을 당하고도 미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런데도 너무 선량한 체, 현명한 체하지 않는다면
꿈을 꾸면서도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생각하면서도 생각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면
승리와 좌절을 만나고도
이 두 가지를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악인들 입에 왜곡되어
어리석은 자들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있다면
네 일생을 바쳐 이룩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낡은 연장을 들어 다시 세울 용기가 있다면
네가 이제껏 성취한 모든 걸 한데 모아서
단 한 번의 승부에 걸 수 있다면
그것을 다 잃고 다시 시작하면서도
결코 후회의 빛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
심장과 신경, 힘줄이 다 닳아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버텨라! 라는 의지뿐일 때도
여전히 버틸 수 있다면
군중과 함께 말하면서도 너의 미덕을 지키고
왕들과 함께 거닐면서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모두들 중히 여기되 누구도 지나치지 않게 대한다면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의 시간을
60초만큼의 장거리 달리기로 채울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무엇보다 아들아,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 J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 영국 시인⸱소설가.
----------------------------------------- 키플링이 열두 살 된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시입니다. 이 시에 그의 철학과 문학의 정수가 응축돼 있지요. 지금은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가슴을 적시는 명시가 됐습니다. BBC가 뽑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1위에 두 번이나 선정됐죠.
우리가 잘 아는 소설 『정글북』도 그의 작품입니다. 1907년 영어권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요. 당시 그의 나이 마흔둘. 지금까지 최연소 수상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특히 영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인도의 군대 생활을 그린 시 ‘병영의 노래’와 ‘7대양’ 등을 통해 영국의 제국주의를 미화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습니다. 조지 오웰로부터 ‘대영제국의 앞잡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죠.
흥미로운 것은 영국에 맞서 불복종 운동을 편 간디가 키플링의 시 ‘만약에…’를 자주 애송했다는 점입니다. 키플링보다 네 살 아래인 간디는 영국에서 공부한 변호사이기도 했죠. 그가 ‘인도의 성자’로 추앙받게 된 이면에 제국주의 시인 키플링이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은 식민지 시대의 외로운 영혼들이었습니다. 영국인이지만 인도에서 태어난 키플링은 인도 문화에 익숙했지만, 교육은 영국에서 받아야 했기에 ‘낯선 고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른바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에서 주변인으로 떠도는 신세였지요. 남다른 아픔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운명을 성찰의 지렛대로 삼았습니다.
간디는 그의 내밀한 상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지요. 그 공감대 위에서 두 사람은 ‘꿈을 꾸면서도 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에 갇히지 않는’ 방법을 함께 찾았습니다. 덕분에 둘은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동반자가 될 수 있었죠.
어린 시절부터 못생긴 얼굴과 가난 때문에 왕따를 당하며 자란 그가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이룰 수 있었던 힘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의지’였습니다. 그는 “모든 상황이 정신없어질 정도로 급변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낡은 연장을 들어 다시 세울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오늘의 영광이 있었다”고 했지요.
전설적인 액션 스타 이소룡도 이 시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너무나 좋아해 이 시를 금속 장식 판에 새겨서 걸어두고는 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고 말했습니다. 워런 버핏이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에 이 시를 인용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니스 경기장인 윔블던 코트의 선수 입장문 위 벽에도 이 시의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승리와 좌절을 만나고도/ 이 두 가지를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If you can meet with Triumph and Disaster/ And treat those two impostors just the same)…’
앞으로도 윔블던 대회의 마지막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이 코트에서 승패의 명암이 엇갈릴 것입니다. 그때 누가 이기고 지든 ‘승리’와 ‘좌절’을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미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도 남겠지요? 우리 또한 그럴 것입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모든 사람이 이성을 잃고 너를 비난해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모두가 너를 의심할 때 자신을 믿고
그들의 의심마저 감싸 안을 수 있다면
기다리면서도 기다림에 지치지 않는다면
속임을 당하고도 거짓과 거래하지 않고
미움을 당하고도 미움에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런데도 너무 선량한 체, 현명한 체하지 않는다면
꿈을 꾸면서도 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생각하면서도 생각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면
승리와 좌절을 만나고도
이 두 가지를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
네가 말한 진실이 악인들 입에 왜곡되어
어리석은 자들을 옭아매는 덫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있다면
네 일생을 바쳐 이룩한 것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낡은 연장을 들어 다시 세울 용기가 있다면
네가 이제껏 성취한 모든 걸 한데 모아서
단 한 번의 승부에 걸 수 있다면
그것을 다 잃고 다시 시작하면서도
결코 후회의 빛을 보이지 않을 수 있다면
심장과 신경, 힘줄이 다 닳아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버텨라! 라는 의지뿐일 때도
여전히 버틸 수 있다면
군중과 함께 말하면서도 너의 미덕을 지키고
왕들과 함께 거닐면서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적이든 친구든 너를 해치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모두들 중히 여기되 누구도 지나치지 않게 대한다면
누군가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1분의 시간을
60초만큼의 장거리 달리기로 채울 수 있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무엇보다 아들아, 너는 비로소 한 사람의 어른이 되는 것이다!
* J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 영국 시인⸱소설가.
----------------------------------------- 키플링이 열두 살 된 아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시입니다. 이 시에 그의 철학과 문학의 정수가 응축돼 있지요. 지금은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가슴을 적시는 명시가 됐습니다. BBC가 뽑은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1위에 두 번이나 선정됐죠.
영국 맞선 인도의 간디가 사랑한 시
그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받았습니다. 젊어서부터 시와 산문을 잘 써서 이름을 날렸는데,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인 헨리 제임스가 훗날 “키플링은 내가 알아 온 사람 중에서 가장 완벽한 천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고 극찬할 정도였죠.우리가 잘 아는 소설 『정글북』도 그의 작품입니다. 1907년 영어권 작가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요. 당시 그의 나이 마흔둘. 지금까지 최연소 수상자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특히 영국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요. 인도의 군대 생활을 그린 시 ‘병영의 노래’와 ‘7대양’ 등을 통해 영국의 제국주의를 미화했다는 비판도 함께 받았습니다. 조지 오웰로부터 ‘대영제국의 앞잡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죠.
흥미로운 것은 영국에 맞서 불복종 운동을 편 간디가 키플링의 시 ‘만약에…’를 자주 애송했다는 점입니다. 키플링보다 네 살 아래인 간디는 영국에서 공부한 변호사이기도 했죠. 그가 ‘인도의 성자’로 추앙받게 된 이면에 제국주의 시인 키플링이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은 식민지 시대의 외로운 영혼들이었습니다. 영국인이지만 인도에서 태어난 키플링은 인도 문화에 익숙했지만, 교육은 영국에서 받아야 했기에 ‘낯선 고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른바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에서 주변인으로 떠도는 신세였지요. 남다른 아픔도 많이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운명을 성찰의 지렛대로 삼았습니다.
간디는 그의 내밀한 상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지요. 그 공감대 위에서 두 사람은 ‘꿈을 꾸면서도 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생각하면서도 생각에 갇히지 않는’ 방법을 함께 찾았습니다. 덕분에 둘은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을 넘어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동반자가 될 수 있었죠.
폴 포츠와 이소룡, 워런 버핏도 애송
요즘도 이 시를 좋아하는 유명인이 많습니다. 고난 끝에 일약 스타가 된 영국 오페라 가수 폴 포츠도 그중 한 명입니다. 휴대폰 판매원이던 그는 “제가 초라한 외모와 가난, 교통사고, 종양 수술 등의 어려움을 딛고 오디션 스타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키플링의 이 시 덕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어린 시절부터 못생긴 얼굴과 가난 때문에 왕따를 당하며 자란 그가 숱한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이룰 수 있었던 힘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의지’였습니다. 그는 “모든 상황이 정신없어질 정도로 급변했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낡은 연장을 들어 다시 세울 용기’를 잃지 않았기에 오늘의 영광이 있었다”고 했지요.
전설적인 액션 스타 이소룡도 이 시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너무나 좋아해 이 시를 금속 장식 판에 새겨서 걸어두고는 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고 말했습니다. 워런 버핏이 주주들에게 보낸 연례 서한에 이 시를 인용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지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테니스 경기장인 윔블던 코트의 선수 입장문 위 벽에도 이 시의 한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승리와 좌절을 만나고도/ 이 두 가지를 똑같이 대할 수 있다면(If you can meet with Triumph and Disaster/ And treat those two impostors just the same)…’
앞으로도 윔블던 대회의 마지막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이 코트에서 승패의 명암이 엇갈릴 것입니다. 그때 누가 이기고 지든 ‘승리’와 ‘좌절’을 똑같은 마음으로 대할 수만 있다면, 그는 이미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모든 이의 존경을 받고도 남겠지요? 우리 또한 그럴 것입니다.
■ 고두현 시인·한국경제 논설위원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