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고르바초프가 남긴 유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서거했다. 개혁·개방의 아이콘으로서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냉전을 평화롭게 끝내는 데 누구보다 많은 일을 했다”고 찬양했다.

1985년 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가 물려받은 대내외 상황은 암담했다. 브레즈네프 말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서기장 시절 소련 제국은 크게 약화됐다. 국방비가 국내총생산의 4분의 1로 민간부문을 크게 압박했다. 인민이 원하는 생활 수준과 복지 혜택을 줄 수 없었다. 개혁과 개방 카드를 꺼내들었다. 1980년대 초 발생한 폴란드 위기는 소련이 감당한 위기 중 가장 혹독한 것이었다. 브레즈네프는 폴란드 개입을 원치 않았다. 폴란드 침공은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동유럽 국가에 대한 지원은 소련 경제를 압박했다. 지원에도 불구하고 반소 감정은 오히려 심화됐다. 식량 부족 문제도 악화일로 상태였다.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의 제한주권론을 폐기함으로써 동유럽에 자유의 물꼬를 텄다. 1989년 10월 동독 인민의회 연설에서 “동독의 장래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베를린에서 결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달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동유럽의 자유화가 뒤를 이었다. 독일 통일에 반대하지 않았다. 사실상 냉전이 종언을 고했다. 그가 없었다면 냉전 종식이 그토록 빨리 실현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베를린 장벽 붕괴는 점진적인 유럽 화해를 위한 그의 장기 계획을 와해시켰다. 그의 친서방주의가 서방 국가와의 협상 능력을 약화시켰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핵무기 경쟁을 억제하는 것을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1986년 4월 8000명의 사망자를 낸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핵 위험이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명백한 현실임을 절감케 했다.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군축의 시동을 걸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을 둘러싼 견해차를 줄이지 못해 합의 도출에는 실패했지만 미·소 양국 지도자의 진정성이 확인됐다. 1987년의 미·소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군축안으로 평가된다. 양국 간 해빙 무드에 힘입어 1988년 2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했다. 1991년 7월 전략무기감축협정을 조인했다. 레이건은 핵무기가 없는, 장벽이 없는 세상을 원했다. 고르바초프도 핵 공포에서 자유로운 세상을 희망했다.

내치가 고르바초프의 발목을 잡았다. 경제와 정치 시스템의 개혁은 유리한 국제적 환경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하에 세바르드나제를 외무장관에 기용하고 대외정책에 올인했다. 경기침체와 재정적자가 소련의 목을 조였다. 동맹국에 대한 재정 지원이 도를 넘어섰다. 유가 하락 등으로 나라 곳간이 텅 비었다. 보드카 규제는 세수 감소와 함께 인민의 분노를 촉발했다. 경직화된 소련 이데올로기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으나 그의 급진적 개혁은 무너진 소련 경제와 재정위기에 쫓겼다. 군부, 당료, 관리 등 노멘클라투라(옛 소련의 특권계급) 계층을 소외시켜 지지 세력 구축에 실패했다.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 집단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이 구축한 권력구조 덕에 중요한 정책 결정을 독점했지만 너무 늦은 의사결정과 좌고우면으로 번번이 실기했다. 동유럽 국가들이 무너지고 이 충격이 소련에 밀려들면서 국가와 당 통제가 약화됐다. 1980년대 중반 글로벌 세력균형이 미국과 서방에 유리하게 변화되는 바람에 ‘중국의 길’을 추구할 기회를 놓친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1991년 8월 보수파 쿠데타 시도로 그의 정치적 자본은 사실상 고갈됐다. 같은 해 12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주도로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했다. 그는 12월 25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소련 경제 붕괴와 지지 세력의 이탈로 권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무력 사용에 대한 혐오감이 커 국가지도자의 책무인 질서 유지 권한을 방기했다는 비판이 무성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소련의 붕괴는 20세기 최대의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개혁은 실패한 제국인 소련을 구하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결과는 역설적으로 제국의 붕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