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진보라는 이름의 가짜 민주주의
후세의 경제사가(經濟史家)들은 윤석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까. 분명히 ‘자유시대’라고 평가할 것이 틀림없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자유를 35회 언급한 데 이어, 제77회 광복절 축사에서도 33번이나 말할 정도로 그는 언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유를 화두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자유시대를 탄생시킨 건 다름 아닌 민주주의(민주)가 아니던가! 민주와 자유의 조화로운 관계는 자유를 위태롭게 하는 게 민주라는 ‘공공선택론’의 유서 깊은 인식을 부정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민주를 단순히 ‘다수결 투표’로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자유와 자본주의를 투표로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주목할 건 자유시대를 열어놓은 민주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자유시대를 배출한 민주는 공공 선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 이게 ‘이념으로서의 민주’다. 이런 민주는 정부 권력을 통제·제한해 자유를 지키는 데 목표를 둔 민주라는 걸 직시해야 한다. ‘자유를 수호하는 민주’로 이해하게 된 배경은 문재인 좌파 정권을 불러온 민주다. 좌파도 이념으로서의 민주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 이념은 ‘진보정치’다. 진보정치는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 포용국가, 경제민주화 등 재분배와 규제, 지원을 요구하는 정책이다.

진보라는 용어는 공익을 위한 정책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사실상 ‘우리’와 ‘그들’로 갈라치기하고 우리를 위해 그들을 희생하는 정책이 진보정치의 특색이다. 진보정치는 민주에 대한 루소의 현대적 버전이다. 시민들이 진보정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게 민주다. 민주 정부의 권력은 제한이 없다. 프랑스혁명이 보여준 것처럼 그런 민주에서는 정부가 시민을 통제한다. 민주가 자유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유다.

현명한 대한민국 시민은 민주 정부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루소의 버전을 버리고 문재인 정권의 탄압에 투표로 저항했다. 좌익정부는 해수부 공무원 피격사건에서 경험했듯이 국민의 생명은 고사하고 자유도 지킬 수 없다는 걸 시민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정부를 자유에 대한 위협의 주요 원천이라고 믿었다. 문재인 정권을 교체하고 윤석열 정부가 등장한 이유다.

“저소득층이 언론에 속아 국민의힘을 더 많이 지지하는 게 안타깝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은 완전히 틀렸다. 저소득층이 언론에 속아서 민주당을 버린 게 아니라 ‘정부는 생명, 자유, 재산을 보호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 시민들은 정부를 교체할 권리가 있다’는 존 로크의 저항권 발동이었다. 그런 사상은 미국 혁명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고 오늘날 미국 시민에게 자유와 번영을 안겨줬다. 미국의 민주이념은 자유였고, 미국 건국자들은 정부를 자유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봤다.

이재명이 이끄는 민주당은 ‘노란봉투법’, 금리폭리방지법, 납품단가연동제 등 정부가 시민을 통제하는 갈라치기의 진보정치로 좌파시민을 선동하고 있다. 탈원전·태양광정책, 검수완박법, ‘방탄 논란’ 등 진보정치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희생을 부른다. 그런 희생을 정의롭고 공정하다고 여기면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가짜 민주시민이다.

흥미롭게도 우리와 그들로 갈라치고 그들을 잠재적 포식자 또는 먹잇감으로 여기는 가짜 민주시민의 성향은 인간이 지닌 부족 본능에 기인한 것이다. 부족 본능은 대략 150명의 비교적 안정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수렵·채집을 통해 살아가던 원시사회에서 터득한 것이다. 그런 인간관계는 구성원들이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회에만 국한됐으며, 외부인과의 상호작용은 종종 적대적이었다. 부족주의를 가장 적절히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게 좌익 정치가다.

그러나 부족주의적 불의를 저지르는 권력 남용의 정부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고 믿는 게 진짜 민주시민의 태도다. 이는 타인의 재산 자유에 대한 존중 등 자본주의 도덕을 따라 본능을 억압하는 문명화된 태도다.

윤석열 정부가 국정 최우선 가치로 경제적 자유 확대에 방점을 찍은 것도 민주시민의 그런 태도를 반영한 것이다. 대한민국 자유의 길의 성패는 시민들이 폐쇄적인 부족주의의 원시적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에 좌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