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만 경상국립대 약대 교수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 출간
생화학무기부터 PTSD까지…물레방아처럼 엮인 전쟁과 약의 관계
전쟁과 질병, 약은 잘 맞춘 세 바퀴 물레방아처럼 지난 수백 년을 함께했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 진통제로 쓰인 모르핀의 원료 아편은 아편전쟁의 명분으로 사용됐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세계로 퍼진 스페인 독감은 역설적으로 전쟁 종식에 일조했다.

최근 미국에서는 접힌 채로 길에 떨어진 지폐를 주웠다가 온몸이 마비된 사람들이 다수 발생했다.

소량만 복용해도 사망할 수 있는 펜타닐 등 마약 성분이 지폐에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일본에서는 옴진리교가 출근길 도쿄 지하철역에 생화학무기 일종인 사린 가스를 살포해 10여 명이 숨지는 등 7천여 명이 피해를 봤다.

백승만 경상국립대 약대 교수는 신간 '전쟁과 약, 기나긴 악연의 역사'에서 이처럼 여러 자극적이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아편과 펜타닐, 메스암페타민과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치료제, 피조스티그민과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제 등 여러 약의 역사를 소개한다.

천연물과 의약품 합성 등을 연구하는 그는 현재 부산·울산·경남 지역 대학생이 들을 수 있는 교양 강의 '전쟁과 질병, 긴 악연의 역사'를 매 학기 진행하고 있다.

이 강의는 1분 만에 수강 신청이 마감될 정도로 인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의에 담지 못한 많은 부분은 신간에 포함했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1939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아편 수입이 막히자 지금도 진통제로 사용되는 페치딘을 개발했다.

모르핀보다 진통 효과가 100배 큰 펜타닐은 페치딘의 구조를 기반으로 1960년대에 개발됐다.

이들 합성 마약류는 아편과 모르핀, 헤로인과 마찬가지로 중독성이 심각한 것이 단점이다.

생화학무기부터 PTSD까지…물레방아처럼 엮인 전쟁과 약의 관계
1990년 이라크 전쟁에 나선 미군은 사담 후세인의 독가스를 두려워해 피리도스티그민 브로마이드라는 해독제를 조금씩 먹었다.

하지만 이라크는 실제로 화학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미군은 매일 먹던 해독제에 중독됐고, 전쟁 이후 참전용사 70만 명 중 3분의 1이 '걸프전 증후군'으로 불리는 PTSD를 호소했다.

1893년 일본 약화학자 나가이 나가요시가 합성한 메스암페타민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필로폰'으로 불리며 피로회복제로 사용됐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가미카제 특공대는 일왕이 준 필로폰 차를 마시고 자살 비행에 나섰고, 독일군은 이 각성제를 먹고 사흘간 잠을 자지 않고 진격했다.

과량 복용 시 사망이 이르는 펜타닐이 공격용 무기가 된 사례도 있다.

2002년 40여 명의 체첸 반군이 독립을 요구하며 러시아 모스크바 오페라 극장에서 700여 명의 관람객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

러시아 측은 수면 가스를 살포하며 인질극을 진압했지만, 140여 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이 수면 가스에는 펜타닐 성분이 들어 있었다.

책은 이 밖에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정적인 알렉세이 나발니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한 이른바 '노비촉 중독 사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 공격을 받고 사망한 사건 등도 소개한다.

저자는 의약품 개발이 우연한 계기로 이뤄진 경우가 많고, 그 계기 가운데 하나로 전쟁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약이 전쟁 때문에 개발된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덧붙인다.

또 전쟁과 질병이 없는 세상은 실현되기 어렵다며, 꾸준히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동아시아. 332쪽. 1만7천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