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년 남성이 노트에 수학 공식을 일사천리로 써 내려갑니다. 그는 탈북한 천재 수학자 이학성(최민식 분)입니다. 학성은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사람)'가 된 고등학생 한지우(김동휘 분)를 만나 수학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 됩니다.
박동훈 감독의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의 내용입니다. 수학이란 다소 딱딱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재밌고 편안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죠. 영화엔 그 윤활유가 되어주는 장치가 있습니다. 학성이 수학 문제를 풀 때마다, 잠자리에 들 때마다 듣는 음악입니다.
이 곡은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중 1번 프렐류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바흐의 대표곡이죠. 영화에서 어려운 수학 공식이 나와도, 이 곡이 함께 흐르면 훨씬 부드럽고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영화는 왜 다른 음악가가 아닌 바흐의 음악을 선택한 걸까요. 바흐만큼 수학과 잘 어울리는 음악가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흐는 천재 수학자인 학성 캐릭터와 비슷한 점도 많습니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수학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무반주 첼로곡을 비롯해 'G선상의 아리아'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 그의 대표곡들 모두 단조롭습니다. 하지만 화려함으로 한껏 포장하고 꾸민 것이 아니기에, 더욱 깊고 정갈하게 느껴집니다.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가 않죠.
오늘날까지 많은 음악가들이 그를 닮고 싶어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영화에선 지우가 학성에게 바흐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학성은 이렇게 답합니다. "바흐는 음악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런 바흐에겐 의외로 수학자적인 면모가 숨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학성은 "인류가 멸망해도 바흐 악보만 있으면 모든 음악을 복원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얘기는 영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대사가 아닙니다. 실제 "세상의 음악이 다 사라진대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만 있으면 복원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피아노의 구약성서'로 불리는 작품집입니다. 바흐가 이 작품집을 내놓기 전까지 음악가들은 '순정률'을 따랐습니다. 순정률은 원래 음정보다 한 옥타브 높은 음을 내기 위해 현의 길이를 3분의 2로 조정하는 조율법을 이릅니다.
그런데 이 순정률에 따라 연주를 하다 보면 오차가 발생합니다. C장조에서 D장조로 바꾸는 등 조바꿈을 하면 갑자기 불협화음이 나죠.
바흐는 이를 바로잡기 위한 방안으로 '평균율'에 주목했습니다. 평균율은 한 옥타브를 정확히 12부분으로 쪼개 음을 똑같은 비율로 연주하는 방식을 이릅니다. 평균율을 접목하면 조바꿈을 해도 불협화음이 나지 않고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습니다.
바흐는 이 평균율에 관한 모든 것을 집대성해 작품집을 냈고, 이는 많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모차르트는 작품집을 접하고 난 후 작곡의 기초를 다시 공부했다고 합니다. 쇼팽은 작품집에 담긴 48곡 전부를 외워서 칠 정도로 연습했습니다.
1977년 미국이 쏘아올린 최초의 인공위성 보이저엔 지구 음악을 대표해 총 27곡의 음악이 실렸습니다. 그중 3곡은 바흐의 작품이며, 하나가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2권에 나오는 'C장조 프렐류드와 푸가'입니다. 다른 두 곡은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 1악장'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이죠.
영화 속 학성처럼 바흐 역시 멋진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한창 바쁘고 명성이 높았던 44살에 굳이 '콜레기움 무지쿰'이란 단체의 감독 자리를 맡았습니다. 이곳은 대학생 중심의 음악 단체였습니다. 바흐는 교육에 대한 열의를 갖고, 대학생 음악가들을 데려다 예배 때마다 무대에 오르게 했습니다.
그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표지엔 이런 얘기가 적혀 있습니다. "간절히 배움을 원하는 젊은 음악가들이 활용하고 이득을 볼 수 있길 바라며." 이 작품집의 1권은 1721년에, 2권은 1741년에 쓰였습니다. 젊은 음악가들을 위해 무려 20여 년간 평균율을 연구하고 집대성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바흐의 음악이 단순하고 간결한 건, 오랜 시간이 걸려도 수학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음악의 공식들과 꾸준히 마주하고 풀어나갔기 때문이 아닐까요. 영화에서 학성은 지우에게 수학을 잘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줍니다.
그 방법은 '수학적 용기'입니다. 학성은 수학적 용기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야, 이거 문제가 참 어렵구나. 내일 다시 한번 풀어봐야겠다' 하는 여유로운 마음, 그게 수학적 용기다."
돌이켜 보니 학창 시절, 수학 문제 앞에선 조금의 여유도 갖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잘 풀리지 않으면 곧장 낙담하고, 그 문제는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말았죠. 어른이 되어 인생이라는 더 크고 복잡한 문제 앞에 서 있는 지금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쉽게 좌절하고, 자주 회피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영화와 바흐의 삶을 함께 살펴보며 깨닫게 됩니다. 인생에도 수학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한발 물러서서 생각해 보는 여유, 내일 또 도전해 보겠다는 끈기 말입니다. 아쉽게도 수학은 포기했었지만, 인생은 결코 그럴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도 오늘부터 수학적 용기를 갖고 인생을 보다 찬찬히 풀어가 보시는 건 어떨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