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CIA가 이슬람 문화 알았다면 9·11은 없었다
1996년 8월 23일 오사마 빈라덴이 미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아프가니스탄의 한 동굴에서 허름한 옷을 걸친 채였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비웃었다. AK-47 소총 한 자루를 손에 쥔 채 흙바닥에 쪼그려 앉은 이 사내가 미국에 위협이 될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무슬림의 눈엔 달리 보였다. 이슬람에서 동굴은 신성한 장소다. 이슬람교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박해를 피해 지낸 곳이 동굴이었기 때문이다. 빈라덴의 남루한 복장은 무슬림들에게 이슬람교의 선지자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치밀한 선전 전략이었다.

[책마을] CIA가 이슬람 문화 알았다면 9·11은 없었다
CIA는 2001년 9·11 테러 직전까지도 빈라덴과 관련한 여러 경고 신호를 무시했다. 왜 그랬을까. <다이버시티 파워>는 ‘다양성 부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1947년 창설된 CIA는 엄격한 채용 과정을 통해 최고 중의 최고만 뽑았다. 그런데 뽑힌 인물들이 대체로 비슷했다. 앵글로색슨족 출신 중상류층 백인 남성에 개신교를 믿었다. 그들 눈에 빈라덴은 현대 문명과 거리가 먼 미개인, 알카에다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다양성이 중요하다는 건 이제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책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설득력을 더한다. 저자는 영국 언론인 출신으로 여섯 권의 책을 낸 베스트셀러 작가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솜씨가 좋다. 깊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여러 학자의 연구를 곳곳에 잘 녹였다.

조직에서 다양성이 중요한 건 ‘관점의 사각지대’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종이에 직사각형을 그려보자. 그 안에 원을 9개 그려 넣을 때 어떻게 해야 빈 공간이 가장 적을까. 원을 가능한 한 겹치지 않게 그려야 한다. 다양성도 이와 같다. 비슷한 사람들로 조직을 꾸리는 건 원을 겹쳐 그리는 것과 같다. 가능한 한 다양한 인재를 모아야 사각지대를 없앨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 해독을 맡은 영국 비밀정보부 산하 블레츨리 파크가 그랬다. 앨런 튜링과 같은 수학자가 주축이 됐지만 다방면의 사람을 끌어모았다. 그중 한 명인 스탠리 세즈윅은 회계법인 사무원이었다. 신문 십자말풀이 대회에 참가했다가 영입됐다. 책은 “앨런 튜링과 비슷한 사람들로 구성된 팀은 임무를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인물로 팀을 구성해도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지 못하는 분위기라면 아무 소용없다. 1996년 일어난 에베레스트 참사의 원인이 그거였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산소통의 산소가 소진되고 있었지만 대원들은 리더에게 하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못했다. 결국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책마을] CIA가 이슬람 문화 알았다면 9·11은 없었다
다양성을 높이는 데 ‘낯선 사람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다. 미국 언론인이 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이 그런 책이다. 자기 경험과 각종 연구 결과를 결합해 매혹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다이버시티 파워>보다 덜 체계적이고 더 문학적이다. 저자는 동물연구소를 찾아가 침팬지와 ‘보노보’(영장류의 일종)의 사회성을 비교하기도 하고, 와이파이 없는 미국 횡단 열차에서 42시간을 보낸 경험을 들려주기도 한다. 잡지처럼 술술 읽힌다.

‘공공장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말 걸지 않기’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옆 사람에게 말을 건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나 장사치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도시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말하는 ‘예의 바른 무관심’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도시에서도 개인은 자신의 사생활을 보장받으며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대로 괜찮을까. 이 세상에 태어나 기껏 몇 사람과 지내다 죽는 게 너무 아쉽지 않을까. 사람 간의 연결을 통해 만들어질 여러 기회를 상실하는 것 아닐까. 책은 용기를 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라고 권한다. 하루하루가 즐거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가게 점원에게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걸로 시작할 수도 있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기 좋은 환경도 있다. 같은 것을 보고 있을 때다. 전시회에서 같은 작품을 볼 때, 여행을 갔을 때, 폭우 등 같은 재난을 당했을 때 등이다. 저자는 “지금 가장 친한 친구도, 사랑스러운 연인도, 믿을 만한 동료도 한때는 모두 낯선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좋은 내용도 잘 읽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알맹이가 없어서도 안 된다. 전문성이냐, 대중성이냐의 문제다. <다이버시티 파워>와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걸면>은 그 균형을 그럭저럭 잘 잡은 책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