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친기업 진보주의'로 가야"…진보이론가의 파격 주장 [인터뷰 전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진보 이론가로 20년 활동한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
이달 초 《좋은 불평등》 펴내
중국의 부상과 한국 불평등
상관관계 집중 분석
“대기업 ‘수출대박’이 불평등 초래”
'억강부약' 등 진보 담론 정면비판
“‘규모의 경제’에 눈감아 대기업 적대시
‘집단지성’이 ‘집단오류’ 일으켜”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
이달 초 《좋은 불평등》 펴내
중국의 부상과 한국 불평등
상관관계 집중 분석
“대기업 ‘수출대박’이 불평등 초래”
'억강부약' 등 진보 담론 정면비판
“‘규모의 경제’에 눈감아 대기업 적대시
‘집단지성’이 ‘집단오류’ 일으켜”
“더불어민주당은 ‘억강부약(抑强扶弱·강자를 누르고 약자를 돕는다)’ 대신 대기업을 장려하는 ‘친기업 진보주의’ 노선을 지향해야 합니다.”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사진)은 25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5년 뒤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다수파 정당’이 되려면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도권과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개혁보수 유권자를 끌어들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 소장은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정책보좌관과 민주연구원 부원장 등을 지내며 20년 넘게 진보 진영에 몸담아온 이론가다. 이달 초 출간한 저서 《좋은 불평등》을 통해 진보 진영의 불평등 담론과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론의 문제점을 꼬집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위쪽 것을 빼서 아래에 나눠주자는 억강부약을 비롯한 한국 진보의 경제관은 상층의 성공을 약탈의 결과로 규정하는 계급론적 접근을 핵심으로 한다”며 “이는 오랜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내면에 찌든 비주류적, 저항세력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한국의 진보 학계와 시민단체, 노동조합, 언론, 정당 등 다수가 두텁게 합의한 불평등 담론에 대해 “집단지성이 집단오류를 일으킨 경우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진보의 통념에 대해선 대(對)중국 수출액과 소득 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 간 상관관계를 짚어내며 반박했다.
대기업을 적대시하며 소기업 보호에 치우쳤던 진보 경제정책은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평균 비용이 감소하는 ‘규모의 경제’라는 원리로 논박했다. 최 소장은 “규모의 경제는 경제성장과 소득상승, 부가가치 증가, 기술 상향, 고기술 등과 연동된 경제학적 법칙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등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방안으로는 규제 완화와 중소기업의 수출기업화를 통한 ‘중부가가치 기업’ 육성을 제시했다.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기업이 대학의 투자·운영 주체가 되는 ‘기업대학’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기존의 진보와 전혀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
민주당의 ‘기초연금 40만원 인상과 지급대상 100% 확대’ 주장에 대해선 “정무적·정책적으로 전혀 지혜로운 접근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최 소장은 “기초연금을 연금제도 중심축으로 가져가면 청년 등 후세대에 ‘증세 폭탄’이 너무 강력해진다”며 “자칫 ‘최저임금 1만원 인상’ 보다 정치적 타격이 더 클 수 있다”고 했다. 이하는 인터뷰 전문.
▷한국사회 소득 불평등의 주된 원인으로 노인 빈곤을 지적했다. 노인 빈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운동권이 됐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정책 쪽 일을 하다 보니 데이터를 많이 봤다.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네 배 가까이 높다. 한국 자살률은 거의 노인자살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가 ‘진짜 약자’에 주목하지 못한 것 아닌가 생각을 했다.
약자에 대한 연민은 진보의 본질이다. 노동운동도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진보의 본질적 의미는 좌파, 우파냐가 아니고 얼마나 미래지향적인가, 약자통합적인가로 봐야 한다. 현재의 진보가 노인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 건 지극히 당파적 접근이다. 국회의원(민병두 전 의원) 보좌관 시절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불효자방지법(자녀가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이미 준 재산증여 취소)’을 입안했다.”
▷책의 첫 부분에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엄마 같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자는 것이 제가 운동권이 된 이유였다. 어머니는 본인 이름 석 자 외엔 한글을 쓰지 못했다. 1930~40년대 생 다수가 그랬다. 그로 인한 빈곤은 연령의 문제뿐 아니라 한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답을 해야 한다.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전쟁의 시대를 살았고 전근대와 근대, 일제와 대한민국의 교차점을 겪었다.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복기해보면 현대사에서 한 세대의 문제였더라. 데이터를 봐도 후기 노인(75세 이상), 그중에서도 여성의 빈곤율이 높다.”
▷책 제목이 ‘좋은 불평등’이다. 불평등은 나쁜 것이라는 진보의 통념을 깬 것인데.
“경제성장이라는 좋은 결과가 소득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진보는 한국 사회 불평등이 심화된 원인으로 1997년 외환위기와 재벌편향·신자유주의 편향·비정규직 남용 정책 등 이른바 ‘3대 적폐론’, 정치권 책임론 등 국내적 요인을 주로 꼽는다. 하지만 데이터는 이런 통념이 틀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치관 논쟁이 아니다. 팩트다.” ▷경제위기는 곧 불평등을 가져온다는 등식을 논파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중(對中) 수출과 불평등의 관계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
“한국의 불평등 추세에는 3대 변곡점이 있었다. 1994년, 2008년, 2015년이다. 책에 나와있듯 경제위기에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건 과학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불평등이 완화됐다. 이런 국면들을 일관된 논리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해답은 수출이었다. 1995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의 수출액과 임금 기준 지니계수의 상관관계는 0.861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대중 수출액과 상관관계는 0.832로 역시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움직였다. 코로나19 확산 충격 직후인 2020년 1~2분기에도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줄면서 불평등이 잠시 완화됐다가 수출이 회복되는 3분기부터 불평등이 다시 증가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진보진영에서 제기한 ‘신자유주의 비판’은 허구에 가까웠다고 보나.
“신자유주의가 무엇이냐는 개념부터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서구에서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을 뜻한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감세, 민영화, 재정 긴축이 핵심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봤듯 한국에서는 이런 정책이 불평등을 변동시킨 요인이 아닌 점이 분명하다.
이미 덩사오핑의 ‘남순강화’와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부터 1997년 사이 부산 신발산업과 대구 섬유산업 등 섬유·가죽·신발 산업에서 일자리가 41.8% 사라졌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국의 세계 경제 진입 여파로 이들 산업에서 일자리가 절반 가까이 날아간 셈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불가피했을까.
“부채비율의 급진적 축소와 급격한 금리 인상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 요구는 부당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부채비율 축소라는 기본적인 방향성은 옳았다고 본다. IMF 위기는 한국 경제 모델이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바뀐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기업경영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식 대규모 확장과 상충되는 것이 수익성과 효율성이다. 이건희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 1등 기업을 표방했다. 1997년 위기가 터지자 삼성은 구조조정 필요성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건희가 ‘과감히 매각할 건 매각하라, 책임은 묻지 않겠다’고 해서 효율성 위주로 그룹 구조가 재편됐다. 한국의 다른 재벌들도 삼성·이건희 모델을 비교적 빠르게 수용했다.
그 덕분에 한국 대기업은 중국 경제 부상과 ‘그레이트 더블링(거대한 두 배)’,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초세계화) 등 글로벌 차원의 경쟁 격화에 효율적 대응이 가능했다. 반면 일본은 대응에 실패해 ‘잃어버린 30년’을 맞이했다.”
▷진보진영의 경제관을 두고선 ‘적폐의 경제학’과 ‘로빈후드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진보의 경제관은 국내 문제에 치우친 계급론적 접근을 핵심으로 한다. 상층의 성공은 약탈의 결과로 규정했다. 해법으로는 위쪽 것을 빼서 아래에 나눠주는 ‘억강부약’ 방식을 제시했다. 왜 그랬을까. 오랜 저항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경험 때문이다.
진보 경제학은 유능한 국정운영을 위한 경제학이 아니다. 저항 세력의 경제학이다. ‘박정희 경제학’을 계승한 한국 주류 보수세력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그게 6대 4 정도 비율이다. 진보는 거기서 그림자만을 과도하게 주목했다. 이제는 저항 세력의 경제학이 아니라 유능한 국정운영의 경제학이 필요하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가 허당이라면 진보는 허당보다 유능해야 한다. 지금 진보는 더 왼쪽으로 가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진보진영에 몸담았던 입장에서, 진보의 합의사항이었던 최저임금 1만원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을 정면 비판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스스로 정치를 왜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내겐 좋은 국정운영을 통해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물론 열심히 ‘용비어천가’를 했다면 한 자리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최저임금 1만원 구상에 대해선 이미 2015년부터 비판을 해왔다. 당연히 이런저런 불이익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은 제 나름대로 민주당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보다 유능해야 한다.”
▷대기업을 적대시하며 소기업 보호에 치우쳤던 진보의 경제철학을 ‘규모의 경제’를 내세워 논박했다. 하지만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라는 진보의 기본 가치에 반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만 한다. 하나는 경제성장이다. 다른 하나는 약자 보호다.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규모의 경제가 경제성장과 소득상승, 부가가치 증가, 기술 상향, 고기술 등 결과와 연동된 경제학적 법칙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인정하는 데서 논의를 출발해야 한다. 경제학적 법칙을 인정하는 진보를 할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진보를 할 건지 선택해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진보정당은 대기업의 독점이나 불공정을 비판하지만 대기업 자체를 비난하진 않는다. 대기업에 대한 진보의 반감은 한국형 진보의 왜곡된 형태. 즉 오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내면에 찌들어있는 비주류적, 저항세력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약자 보호는, 경제정책이 아니라 사회정책과 복지정책이 중심이 돼야 한다. 사회안전망 강화 등이 해당한다. 약자 보호가 진보의 기본 가치지만 그렇다고 경제를 안 좋게 만들면서 보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경제정책에서는 부강부약(扶强扶弱)을 해야지, 억강부약(抑强扶弱) 하면 안 된다. 글로벌 경쟁에 노출된 상황에선 강자건, 약자건 모두의 상향이동을 도와야 한다. 약자를 돕는다고 강자를 억눌러 경제의 효율성 자체를 저해하는 건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는 경제정책에서 보수와 어떤 차별점을 가질 수 있나.
“좌파냐 우파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유능한지다. 국민의힘은 성장, 민주당은 분배가 아니라. 성장과 분배 모두 민주당이 더 잘하고, 친기업과 친노동도 민주당이 더 잘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원론적인 해법이다.
차별점은 재벌개혁에서 찾으면 된다. 재벌의 개념적 본질은 소수 지분을 가진 가문이 과도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외국에는 대기업은 있지만 재벌은 없다. 대기업은 장려하되 재벌은 개혁해야 한다. 소수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입법 활동에 나서는 것이 국민의힘과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이다. 민주당은 재벌에 맞서 주주 이익을 잘 대변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보수가 ‘재벌 자본주의’를 지향한다면 민주당은 ‘주주 자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군사정권 시절 불평등이 낮았던 상황을 ‘권위주의적 연대임금제’라고 표현했다. 1997년 위기 이후 부채비율 축소가 노동시장 이중구조화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인상적이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기원은 부채비율 축소로 형성된 자본시장 이중구조화에 있다. 부채비율의 급진적 축소로 경쟁력을 보유한 대기업 위주의 노동시장 상층은 ‘수출대박’에 따른 소득 상승을 누릴 수 있었던 반면, 소규모 저부가가치 사업 종사자 비중이 높은 하층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이중구조를 완화하려면 하층을 끌어올려 중간층을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규모의 경제와 연동된 중부가가치 기업을 많이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타다금지법’ 같은 규제 완화 이슈와도 연결된다. 규제 완화는 중부가가치-중임금 사업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중소기업을 기술 기반 수출기업으로 만드는 정책이다. 기술과 수출에 기반한 중소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는 국내 노동시장만의 문제로 접근하기 보단, 글로벌 경쟁을 염두에 둔 계층과 기업 사다리 정책으로 고민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져야 가난한 노동자 계급 자녀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 ▷진보의 ‘적폐의 경제학’의 대안으로 ‘환경변화의 경제학’을 내세우면서 국가 간 경쟁이라는 글로벌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보진영에서 글로벌 경쟁의 중요성을 부각한 건 처음인 것 같다.
“책에서 분량 조절 문제로 삭제한 주제가 있다. 바로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됐느냐는 부분이다.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일본 민족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본다. 그런데 19세기 말 아시아에서 식민지가 안 된 나라는 일본과 태국 두 나라 뿐이다.
결국 세계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글로벌 제국주의 질서에 따라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이다. 즉 제국주의 국가와 피식민지 국가간 경쟁력 격차가 너무 커져서 식민지가 됐다. 그만큼 조선은 국제질서와 환경 변화에 둔감했다.
지금의 한국이 선진국이 된 것도 국가 간 경쟁과 국제질서란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보수는 경제에서, 진보는 민주주의와 복지에서 국제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며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복지수준 향상을 이뤄낸 데에는 보수와 진보의 역할이 각각 있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했으면 지금처럼 선진국이 못 됐고, 자유로운 디지털 경제와 한류 콘텐츠가 발달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 교육의 고급화를 주장하며 등록금 동결 정책을 비판했다. 기업이 대학의 투자 및 운영 주체가 되는 ‘기업대학’ 필요성도 강조했다. 지금껏 진보가 강조해온 교육 철학·정책과 상반된 것 아닌가.
“‘진보의 교육철학은 국가·기업·개인의 경쟁력 강화를 반대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경제성장의 핵심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한 고기술 경제로의 진입이다. 한국 기업이 그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명문대 교육 수준이 미국의 스탠퍼드대나 매사추세츠공대(MIT), 중국 칭화대에 뒤져선 안 된다. 경제의 고부가가치 상향에 가장 중요한 고등교육과 연구개발(R&D)의 역할을 부정하는 건 진보건 아니건 큰 잘못이다.
특히 이공계 대학은 교육 수준을 높이려면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장비와 교육 콘텐츠를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세계적으로 유능한 교수도 많이 영입해야 한다.
반면 등록금 동결 정책은 대학생들을 그저 ‘싼 맛에 졸업시키는’ 것을 본질로 한다. 현재 세계 인구 80억명 중 미국·유럽 등 고소득 국가 인구가 10억명 정도다. 이 10억명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싼 맛에 졸업시키는 데 급급한 게 지금 교육정책의 현실이다. 진보가 압박하고 보수정부가 집행해 대학 교육을 망치고 있다.” ▷세계 질서와 연결된 교육혁명을 강조하며 기초학력 국가책임제, 영어 무상교육 등 ‘교육 수요자가 원하는 미래 대응능력 함양’을 강조했다.
“영어와 중국어 등 ‘제국의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외국어 교육을 내실화해야 한다. 학교 수업이나 방과 후 활동에서 외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1안은 학교 교육 내실화, 2안은 방과 후 활동 내실화. 그래도 안 되면 3안으로 학원에서라도 하자. 저소득층 자녀를 위해선 학원 쿠폰이라도 제공하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반발 때문에 학교에서 못하면 사교육 쿠폰이라도 주자는 것이다. 교사단체 이익과 학생의 이익이 충돌한다면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겠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기초연금을 월 40만원으로 올리면서 지급대상도 100%로 확대하고 부부 감액 제도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책에선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간 균형이 중요하다며 기초연금 대상자를 점진적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민주당 주장은 얼핏 보면 단기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책 논쟁이 붙으면 불리한 접근이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보다 정치적 타격이 더 클 수 있다. 정무적·정책적으로 지혜로운 접근이 전혀 아니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불과 25년 만에 부양할 노인이 인구 100명 중 7명에서 20명이 됐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약 3배의 증세와 동의어다. 그렇지 않아도 복지는 하방경직성이 강한 특성이 있다. 청년 및 장년 세대에 초고령화발 ‘증세 폭탄’이 터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정치권은 이를 완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내년 기초연금에만 17조원(국비)이 든다. 2027년에는 24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런데 민주당 안대로 가면 43조원으로 거의 두 배가 된다.”
▷기초연금은 어떻게 개편해야 하나.
“기초연금은 정액제를 통해 대상자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저소득 노인에 한해 일몰제 방식으로 보충연금을 도입해야 한다. 노인은 75세 미만 전기 노인과 75세 이상 후기 노인으로 나뉜다. 전기 노인은 이미 국민연금 가입률이 60%가 넘는다. 원래 기초연금의 역사적 의미는 국민연금 도입이 늦었던 것을 시대적·세대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이다. 만약 기초연금을 노령인구 연금제도의 중심축으로 가져가면 후세대에 증세 폭탄이 너무 강력해진다. 전기 노인은 국민연금으로 커버하되 보완적 역할을 기초연금이 해야 한다.
기초연금 수급자는 정액제로 바꿔 장기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최대한 줄여야 한다. 현재 수급 대상인 소득 하위 70%가 2인 부부 가구 기준 월 288만원인데. 이 액수를 기준으로 지급대상을 동결하고 그 다음해에는 물가상승률만 반영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절감된 예산은 75세 이상 후기 노인 중 빈곤층에 한해 보충 연금을 추가 지급하는 데 쓰면 된다.”
▷민주당이 5년 뒤 정권을 되찾아 오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사회정책은 억강부약으로 가더라도 경제정책은 부강부약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친기업 진보주의’ 노선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못한다고 해서 ‘더 왼쪽으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유능하면 충분하다. 더 진보적이기 보다 더 유능한 민주당, 그것이 정책적으로나 정무적으로나 옳고 이기는 민주당의 비결이다.
민주당이 전국에서 다수파 정당이 되려면 수도권과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개혁보수 유권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이들은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학력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승민 찍어내기’를 반대했고, 탄핵에 찬성했다.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1만원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에는 반대했다.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에 반대하면서 검사 출신인 윤석열 후보의 집권에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부강부약과 친기업 진보주의는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노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초연금 100% 확대를 밀어붙이는 건 오히려 민주당에 대한 회의감과 반감만 커지게 할 것이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 소장(사진)은 25일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민주당이 5년 뒤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있는 ‘다수파 정당’이 되려면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수도권과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개혁보수 유권자를 끌어들여야 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 소장은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 정책보좌관과 민주연구원 부원장 등을 지내며 20년 넘게 진보 진영에 몸담아온 이론가다. 이달 초 출간한 저서 《좋은 불평등》을 통해 진보 진영의 불평등 담론과 문재인 정부 소득주도성장론의 문제점을 꼬집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위쪽 것을 빼서 아래에 나눠주자는 억강부약을 비롯한 한국 진보의 경제관은 상층의 성공을 약탈의 결과로 규정하는 계급론적 접근을 핵심으로 한다”며 “이는 오랜 반독재·민주화투쟁으로 내면에 찌든 비주류적, 저항세력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 소장은 한국의 진보 학계와 시민단체, 노동조합, 언론, 정당 등 다수가 두텁게 합의한 불평등 담론에 대해 “집단지성이 집단오류를 일으킨 경우에 해당한다”고 비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진보의 통념에 대해선 대(對)중국 수출액과 소득 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 간 상관관계를 짚어내며 반박했다.
대기업을 적대시하며 소기업 보호에 치우쳤던 진보 경제정책은 생산량이 증가함에 따라 평균 비용이 감소하는 ‘규모의 경제’라는 원리로 논박했다. 최 소장은 “규모의 경제는 경제성장과 소득상승, 부가가치 증가, 기술 상향, 고기술 등과 연동된 경제학적 법칙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 등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소하는 방안으로는 규제 완화와 중소기업의 수출기업화를 통한 ‘중부가가치 기업’ 육성을 제시했다. 교육정책에 대해서도 기업이 대학의 투자·운영 주체가 되는 ‘기업대학’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기존의 진보와 전혀 다른 해법을 내놓았다.
민주당의 ‘기초연금 40만원 인상과 지급대상 100% 확대’ 주장에 대해선 “정무적·정책적으로 전혀 지혜로운 접근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최 소장은 “기초연금을 연금제도 중심축으로 가져가면 청년 등 후세대에 ‘증세 폭탄’이 너무 강력해진다”며 “자칫 ‘최저임금 1만원 인상’ 보다 정치적 타격이 더 클 수 있다”고 했다. 이하는 인터뷰 전문.
▷한국사회 소득 불평등의 주된 원인으로 노인 빈곤을 지적했다. 노인 빈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운동권이 됐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 진보진영에서 정책 쪽 일을 하다 보니 데이터를 많이 봤다. 한국 노인의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네 배 가까이 높다. 한국 자살률은 거의 노인자살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우리가 ‘진짜 약자’에 주목하지 못한 것 아닌가 생각을 했다.
약자에 대한 연민은 진보의 본질이다. 노동운동도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진보의 본질적 의미는 좌파, 우파냐가 아니고 얼마나 미래지향적인가, 약자통합적인가로 봐야 한다. 현재의 진보가 노인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 건 지극히 당파적 접근이다. 국회의원(민병두 전 의원) 보좌관 시절 그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서 ‘불효자방지법(자녀가 부양의무를 다하지 않을 경우 이미 준 재산증여 취소)’을 입안했다.”
▷책의 첫 부분에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어르신들에 대한 존경을 표했다.
“엄마 같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자는 것이 제가 운동권이 된 이유였다. 어머니는 본인 이름 석 자 외엔 한글을 쓰지 못했다. 1930~40년대 생 다수가 그랬다. 그로 인한 빈곤은 연령의 문제뿐 아니라 한 세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보답을 해야 한다.
현대사에서 가장 힘든 전쟁의 시대를 살았고 전근대와 근대, 일제와 대한민국의 교차점을 겪었다. 어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복기해보면 현대사에서 한 세대의 문제였더라. 데이터를 봐도 후기 노인(75세 이상), 그중에서도 여성의 빈곤율이 높다.”
▷책 제목이 ‘좋은 불평등’이다. 불평등은 나쁜 것이라는 진보의 통념을 깬 것인데.
“경제성장이라는 좋은 결과가 소득 불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진보는 한국 사회 불평등이 심화된 원인으로 1997년 외환위기와 재벌편향·신자유주의 편향·비정규직 남용 정책 등 이른바 ‘3대 적폐론’, 정치권 책임론 등 국내적 요인을 주로 꼽는다. 하지만 데이터는 이런 통념이 틀렸다고 말한다. 이것은 가치관 논쟁이 아니다. 팩트다.” ▷경제위기는 곧 불평등을 가져온다는 등식을 논파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대중(對中) 수출과 불평등의 관계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
“한국의 불평등 추세에는 3대 변곡점이 있었다. 1994년, 2008년, 2015년이다. 책에 나와있듯 경제위기에 불평등이 심화됐다는 건 과학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심지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불평등이 완화됐다. 이런 국면들을 일관된 논리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해답은 수출이었다. 1995년부터 2020년까지 한국의 수출액과 임금 기준 지니계수의 상관관계는 0.861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 같은 기간 대중 수출액과 상관관계는 0.832로 역시 매우 유사한 패턴으로 움직였다. 코로나19 확산 충격 직후인 2020년 1~2분기에도 저임금 노동자 비중이 줄면서 불평등이 잠시 완화됐다가 수출이 회복되는 3분기부터 불평등이 다시 증가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진보진영에서 제기한 ‘신자유주의 비판’은 허구에 가까웠다고 보나.
“신자유주의가 무엇이냐는 개념부터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서구에서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과 ‘레이거니즘’을 뜻한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감세, 민영화, 재정 긴축이 핵심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봤듯 한국에서는 이런 정책이 불평등을 변동시킨 요인이 아닌 점이 분명하다.
이미 덩사오핑의 ‘남순강화’와 한·중 수교가 이뤄진 1992년부터 1997년 사이 부산 신발산업과 대구 섬유산업 등 섬유·가죽·신발 산업에서 일자리가 41.8% 사라졌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이 시작되기도 전에 중국의 세계 경제 진입 여파로 이들 산업에서 일자리가 절반 가까이 날아간 셈이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은 불가피했을까.
“부채비율의 급진적 축소와 급격한 금리 인상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축 요구는 부당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부채비율 축소라는 기본적인 방향성은 옳았다고 본다. IMF 위기는 한국 경제 모델이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바뀐 분기점이었기 때문이다.
기업경영에서는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식 대규모 확장과 상충되는 것이 수익성과 효율성이다. 이건희는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 1등 기업을 표방했다. 1997년 위기가 터지자 삼성은 구조조정 필요성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건희가 ‘과감히 매각할 건 매각하라, 책임은 묻지 않겠다’고 해서 효율성 위주로 그룹 구조가 재편됐다. 한국의 다른 재벌들도 삼성·이건희 모델을 비교적 빠르게 수용했다.
그 덕분에 한국 대기업은 중국 경제 부상과 ‘그레이트 더블링(거대한 두 배)’,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초세계화) 등 글로벌 차원의 경쟁 격화에 효율적 대응이 가능했다. 반면 일본은 대응에 실패해 ‘잃어버린 30년’을 맞이했다.”
▷진보진영의 경제관을 두고선 ‘적폐의 경제학’과 ‘로빈후드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했다.
“한국 진보의 경제관은 국내 문제에 치우친 계급론적 접근을 핵심으로 한다. 상층의 성공은 약탈의 결과로 규정했다. 해법으로는 위쪽 것을 빼서 아래에 나눠주는 ‘억강부약’ 방식을 제시했다. 왜 그랬을까. 오랜 저항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경험 때문이다.
진보 경제학은 유능한 국정운영을 위한 경제학이 아니다. 저항 세력의 경제학이다. ‘박정희 경제학’을 계승한 한국 주류 보수세력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그게 6대 4 정도 비율이다. 진보는 거기서 그림자만을 과도하게 주목했다. 이제는 저항 세력의 경제학이 아니라 유능한 국정운영의 경제학이 필요하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가 허당이라면 진보는 허당보다 유능해야 한다. 지금 진보는 더 왼쪽으로 가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진보진영에 몸담았던 입장에서, 진보의 합의사항이었던 최저임금 1만원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을 정면 비판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스스로 정치를 왜 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내겐 좋은 국정운영을 통해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물론 열심히 ‘용비어천가’를 했다면 한 자리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최저임금 1만원 구상에 대해선 이미 2015년부터 비판을 해왔다. 당연히 이런저런 불이익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것은 제 나름대로 민주당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의 차기 정부는 문재인 정부보다 유능해야 한다.”
▷대기업을 적대시하며 소기업 보호에 치우쳤던 진보의 경제철학을 ‘규모의 경제’를 내세워 논박했다. 하지만 약자에 대한 연민과 배려라는 진보의 기본 가치에 반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든다.
“우리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만 한다. 하나는 경제성장이다. 다른 하나는 약자 보호다.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규모의 경제가 경제성장과 소득상승, 부가가치 증가, 기술 상향, 고기술 등 결과와 연동된 경제학적 법칙이란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인정하는 데서 논의를 출발해야 한다. 경제학적 법칙을 인정하는 진보를 할 건지, 아니면 무시하는 진보를 할 건지 선택해야 한다.
미국이나 유럽의 진보정당은 대기업의 독점이나 불공정을 비판하지만 대기업 자체를 비난하진 않는다. 대기업에 대한 진보의 반감은 한국형 진보의 왜곡된 형태. 즉 오랜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내면에 찌들어있는 비주류적, 저항세력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약자 보호는, 경제정책이 아니라 사회정책과 복지정책이 중심이 돼야 한다. 사회안전망 강화 등이 해당한다. 약자 보호가 진보의 기본 가치지만 그렇다고 경제를 안 좋게 만들면서 보호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경제정책에서는 부강부약(扶强扶弱)을 해야지, 억강부약(抑强扶弱) 하면 안 된다. 글로벌 경쟁에 노출된 상황에선 강자건, 약자건 모두의 상향이동을 도와야 한다. 약자를 돕는다고 강자를 억눌러 경제의 효율성 자체를 저해하는 건 바람직한 방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보는 경제정책에서 보수와 어떤 차별점을 가질 수 있나.
“좌파냐 우파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더 유능한지다. 국민의힘은 성장, 민주당은 분배가 아니라. 성장과 분배 모두 민주당이 더 잘하고, 친기업과 친노동도 민주당이 더 잘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원론적인 해법이다.
차별점은 재벌개혁에서 찾으면 된다. 재벌의 개념적 본질은 소수 지분을 가진 가문이 과도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외국에는 대기업은 있지만 재벌은 없다. 대기업은 장려하되 재벌은 개혁해야 한다. 소수 주주의 권리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입법 활동에 나서는 것이 국민의힘과 차별화할 수 있는 길이다. 민주당은 재벌에 맞서 주주 이익을 잘 대변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보수가 ‘재벌 자본주의’를 지향한다면 민주당은 ‘주주 자본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군사정권 시절 불평등이 낮았던 상황을 ‘권위주의적 연대임금제’라고 표현했다. 1997년 위기 이후 부채비율 축소가 노동시장 이중구조화를 불러왔다는 분석도 인상적이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기원은 부채비율 축소로 형성된 자본시장 이중구조화에 있다. 부채비율의 급진적 축소로 경쟁력을 보유한 대기업 위주의 노동시장 상층은 ‘수출대박’에 따른 소득 상승을 누릴 수 있었던 반면, 소규모 저부가가치 사업 종사자 비중이 높은 하층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이중구조를 완화하려면 하층을 끌어올려 중간층을 두텁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규모의 경제와 연동된 중부가가치 기업을 많이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은 ‘타다금지법’ 같은 규제 완화 이슈와도 연결된다. 규제 완화는 중부가가치-중임금 사업과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중소기업을 기술 기반 수출기업으로 만드는 정책이다. 기술과 수출에 기반한 중소기업을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는 국내 노동시장만의 문제로 접근하기 보단, 글로벌 경쟁을 염두에 둔 계층과 기업 사다리 정책으로 고민해야 한다. 중소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져야 가난한 노동자 계급 자녀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 ▷진보의 ‘적폐의 경제학’의 대안으로 ‘환경변화의 경제학’을 내세우면서 국가 간 경쟁이라는 글로벌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보진영에서 글로벌 경쟁의 중요성을 부각한 건 처음인 것 같다.
“책에서 분량 조절 문제로 삭제한 주제가 있다. 바로 조선은 왜 식민지가 됐느냐는 부분이다. 기존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일본 민족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고 본다. 그런데 19세기 말 아시아에서 식민지가 안 된 나라는 일본과 태국 두 나라 뿐이다.
결국 세계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글로벌 제국주의 질서에 따라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이다. 즉 제국주의 국가와 피식민지 국가간 경쟁력 격차가 너무 커져서 식민지가 됐다. 그만큼 조선은 국제질서와 환경 변화에 둔감했다.
지금의 한국이 선진국이 된 것도 국가 간 경쟁과 국제질서란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보수는 경제에서, 진보는 민주주의와 복지에서 국제 환경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했다. 한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하며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복지수준 향상을 이뤄낸 데에는 보수와 진보의 역할이 각각 있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못했으면 지금처럼 선진국이 못 됐고, 자유로운 디지털 경제와 한류 콘텐츠가 발달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학 교육의 고급화를 주장하며 등록금 동결 정책을 비판했다. 기업이 대학의 투자 및 운영 주체가 되는 ‘기업대학’ 필요성도 강조했다. 지금껏 진보가 강조해온 교육 철학·정책과 상반된 것 아닌가.
“‘진보의 교육철학은 국가·기업·개인의 경쟁력 강화를 반대하는 것이냐’는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경제성장의 핵심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한 고기술 경제로의 진입이다. 한국 기업이 그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려면 명문대 교육 수준이 미국의 스탠퍼드대나 매사추세츠공대(MIT), 중국 칭화대에 뒤져선 안 된다. 경제의 고부가가치 상향에 가장 중요한 고등교육과 연구개발(R&D)의 역할을 부정하는 건 진보건 아니건 큰 잘못이다.
특히 이공계 대학은 교육 수준을 높이려면 꾸준한 투자가 필요하다. 장비와 교육 콘텐츠를 계속 업그레이드하고, 세계적으로 유능한 교수도 많이 영입해야 한다.
반면 등록금 동결 정책은 대학생들을 그저 ‘싼 맛에 졸업시키는’ 것을 본질로 한다. 현재 세계 인구 80억명 중 미국·유럽 등 고소득 국가 인구가 10억명 정도다. 이 10억명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하는데 싼 맛에 졸업시키는 데 급급한 게 지금 교육정책의 현실이다. 진보가 압박하고 보수정부가 집행해 대학 교육을 망치고 있다.” ▷세계 질서와 연결된 교육혁명을 강조하며 기초학력 국가책임제, 영어 무상교육 등 ‘교육 수요자가 원하는 미래 대응능력 함양’을 강조했다.
“영어와 중국어 등 ‘제국의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외국어 교육을 내실화해야 한다. 학교 수업이나 방과 후 활동에서 외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1안은 학교 교육 내실화, 2안은 방과 후 활동 내실화. 그래도 안 되면 3안으로 학원에서라도 하자. 저소득층 자녀를 위해선 학원 쿠폰이라도 제공하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반발 때문에 학교에서 못하면 사교육 쿠폰이라도 주자는 것이다. 교사단체 이익과 학생의 이익이 충돌한다면 누구의 이익을 우선해야겠나.”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기초연금을 월 40만원으로 올리면서 지급대상도 100%로 확대하고 부부 감액 제도도 폐지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책에선 기초연금과 국민연금 간 균형이 중요하다며 기초연금 대상자를 점진적으로 축소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민주당 주장은 얼핏 보면 단기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정책 논쟁이 붙으면 불리한 접근이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보다 정치적 타격이 더 클 수 있다. 정무적·정책적으로 지혜로운 접근이 전혀 아니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가장 빨리 초고령사회에 진입한다. 불과 25년 만에 부양할 노인이 인구 100명 중 7명에서 20명이 됐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약 3배의 증세와 동의어다. 그렇지 않아도 복지는 하방경직성이 강한 특성이 있다. 청년 및 장년 세대에 초고령화발 ‘증세 폭탄’이 터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정치권은 이를 완화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현행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내년 기초연금에만 17조원(국비)이 든다. 2027년에는 24조원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그런데 민주당 안대로 가면 43조원으로 거의 두 배가 된다.”
▷기초연금은 어떻게 개편해야 하나.
“기초연금은 정액제를 통해 대상자를 점진적으로 축소하고, 저소득 노인에 한해 일몰제 방식으로 보충연금을 도입해야 한다. 노인은 75세 미만 전기 노인과 75세 이상 후기 노인으로 나뉜다. 전기 노인은 이미 국민연금 가입률이 60%가 넘는다. 원래 기초연금의 역사적 의미는 국민연금 도입이 늦었던 것을 시대적·세대적으로 방어하는 역할이다. 만약 기초연금을 노령인구 연금제도의 중심축으로 가져가면 후세대에 증세 폭탄이 너무 강력해진다. 전기 노인은 국민연금으로 커버하되 보완적 역할을 기초연금이 해야 한다.
기초연금 수급자는 정액제로 바꿔 장기적으로, 그리고 점진적으로 최대한 줄여야 한다. 현재 수급 대상인 소득 하위 70%가 2인 부부 가구 기준 월 288만원인데. 이 액수를 기준으로 지급대상을 동결하고 그 다음해에는 물가상승률만 반영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절감된 예산은 75세 이상 후기 노인 중 빈곤층에 한해 보충 연금을 추가 지급하는 데 쓰면 된다.”
▷민주당이 5년 뒤 정권을 되찾아 오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사회정책은 억강부약으로 가더라도 경제정책은 부강부약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친기업 진보주의’ 노선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못한다고 해서 ‘더 왼쪽으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유능하면 충분하다. 더 진보적이기 보다 더 유능한 민주당, 그것이 정책적으로나 정무적으로나 옳고 이기는 민주당의 비결이다.
민주당이 전국에서 다수파 정당이 되려면 수도권과 부울경(부산·울산·경남)의 개혁보수 유권자를 끌어들여야 한다. 이들은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학력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유승민 찍어내기’를 반대했고, 탄핵에 찬성했다.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1만원 인상과 소득주도성장에는 반대했다. 이재명 후보의 기본소득에 반대하면서 검사 출신인 윤석열 후보의 집권에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부강부약과 친기업 진보주의는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노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초연금 100% 확대를 밀어붙이는 건 오히려 민주당에 대한 회의감과 반감만 커지게 할 것이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