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의 배터리 계열사인 SK온은 지난 7월 금융회사와 1조5997억원 규모의 차입 계약을 체결했다. 배터리 생산능력 확충을 위한 설비투자와 회사 운영자금을 선제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다. 올해 3분기 HDC현대산업개발(1700억원)을 비롯해 KCC건설(500억원) LX하우시스(500억원) 등도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현상’으로 경기 하강 속도가 빨라지자 기업들이 유동성 확보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분석이다.
"믿을 건 현금뿐"…SK하이닉스 차입금 4.7조, LG화학 2.3조 늘어

국내 상장사 차입금 16.9%↑

25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화학 현대자동차 기아 삼성물산 SK이노베이션 LG전자 고려아연 HMM 등 한국을 대표하는 10개 상장사의 올해 6월 말 총차입금(별도 기준)은 68조2662억원으로, 작년 6월 말보다 9조8505억원(16.9%) 증가했다.

SK하이닉스 총차입금은 15조6580억원으로 이 기간 4조7627억원 늘었다. 현대차도 7조7838억원으로 8799억원 증가했다.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이어온 고려아연 총차입금도 4904억원으로 불어났다.

대기업은 물론 중견기업도 차입금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지난 7~9월 하림그룹 계열사인 팜스코(350억원)와 AK네트웍스(300억원), 페이퍼코리아(198억원), 대동스틸(150억원) 등은 금융사와 각각 차입한도 계약을 잇따라 체결했다.

국내 기업들이 올 들어 8월까지 조달한 자금은 총 114조8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코로나19로 자금 수요가 컸던 2020년 1~8월(117조4000억원)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기업들은 자금 조달 방안으로 회사채보다 은행 대출을 선호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8월 말 은행권 기업대출 잔액은 1146조1000억원으로, 작년 말 대비 80조4000억원(7.6%) 증가했다. 은행 대출이 급격히 늘어난 건 대출금리가 회사채 금리보다 덜 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대기업 대출 평균 금리(신규취급액) 추정치는 AA- 3년 만기 회사채 평균 금리(연 4.226%)보다 0.2%포인트 낮았다. 4~7월까지 월평균 금리를 보면 대출금리가 회사채 금리를 밑돌았다.

금리 3%포인트↑ 원자재값 60%↑

기업들이 대규모 유동성 확보에 나선 것은 경영 여건을 둘러싼 실물경제가 갈수록 나빠지는 것과 맞물린다. 선제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자금 조달 비용이 더 증가하기 전에 자금을 확보하려는 수요도 늘었다. 3년 만기 ‘AA-’ 등급 회사채 평균금리는 지난 23일 연 5.189%로, 연중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1년 전 같은 날(1.996%)과 비교하면 2.6배 치솟았다. 한은이 당분간 기준금리를 인상할 계획인 만큼 시장금리는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치솟는 원자재 가격에 대비해 원재료 재고를 넉넉하게 가져가려는 차원의 자금 확보도 있었다. 1~7월 한국의 원유도입단가는 배럴당 평균 103달러로 작년 동기(64달러)에 비해 60.9% 뛰었다. 1~7월 원유 가스 광물 등 원자재 수입비용은 2320억1000만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43.9% 증가했다. 류창훈 한은 금융시장국 과장은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 수입물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기업들이 제품 생산에 필요한 각종 원·부자재 구입 비용이 늘었다”고 분석했다.

금융권 건전성 훼손 우려도

기업대출이 급증하면서 은행권의 건전성 유지가 어려울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기 때문이다. 특히 60조원 규모의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상 코로나19 금융 지원이 9월 말 종료되면 부실이 비대해질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고강도 가계대출 규제에 비해 기업대출 규제는 전무한 수준”이라며 “기업대출의 80% 이상은 취약 자영업자와 중소기업 대출에 집중해 있어 대규모 부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상호금융·상호저축은행 등 비은행 금융권의 기업대출 규모가 커지는 것도 위험 요소다. 비은행 금융권의 기업대출 잔액은 1월 361조7162억원에서 7월 415조9326억원으로 54조2164억원 증가했다.

불어나는 대출에 비해 관련 상호금융 관리책도 부족한 실정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1일 상호금융업권의 개인사업자·법인 대출 중 부동산·건설업을 각각 총대출의 30% 이하(총대출액의 50% 이하)로 제한하는 감독 규정 개정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개정안 적용 시기가 2024년 12월로 늦고 이외에 뚜렷한 규제 방안이 없어 기업대출의 증가세를 막기에 역부족이란 평가다.

김익환/이소현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