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선 'ㅋㅋㅋ' 금지!…틱톡 대신 묵직한 북토크 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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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일상의 모험가들
온라인 독서 플랫폼 '그믐' 연 소설가 장강명-김혜정 부부
직장 15년차에 사표 쓴 김 대표
번아웃 넘어 존재에 의문
남편 소설가 장강명과
제주도 머물며 고민하다
활력 주던 독서모임 떠올려
온라인 독서 플랫폼 '그믐' 연 소설가 장강명-김혜정 부부
직장 15년차에 사표 쓴 김 대표
번아웃 넘어 존재에 의문
남편 소설가 장강명과
제주도 머물며 고민하다
활력 주던 독서모임 떠올려
“당신의 ‘인생 책’은 무엇인가요?” 온라인 독서플랫폼 ‘그믐’은 회원 가입할 때 이런 질문을 던진다.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든 답하기 쉽지 않다. 내 인생을 바꾼 책, 인생을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책, 내 가치관에 가장 잘 맞는 책…. ‘인생 책’을 정의하려면 일단 자신의 인생부터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생 책을 묻는다는 건 실은 이런 질문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원하나요?’
아직 본격적으로 운영에 나서지도 않은 그믐에서는 벌써 2000명 넘는 사람들이 이 사이트에 모여 ‘인생 책’을 찾고 있다. 시범 서비스 기간 석 달여 만에 110개 넘는 독서모임이 만들어졌다. 책 읽는 사람이 귀한 시대, 왜 사람들은 그믐으로 모여들었을까.
29일 그믐을 정식 오픈한 김혜정 대표(43)는 “각자 인생을 전력 질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묻도록 하는 게 책의 강점이자 그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 질문을 제때 하지 않으면 암흑 같은 시간을 만나게 되거든요.”
15년 차 회사원이었던 김 대표는 지난해 ‘중년의 위기’를 맞았다. 회계 경력을 쌓으며 최고재무책임자(CFO)를 향해 달려가던 때였다. 단순한 번아웃 증후군이 아니었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던 삶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혔다.
결국 퇴사를 했다. 우울의 늪에 빠져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그를 남편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 장강명 작가가 제주도로 데려갔다. 밤바다를 걷고, 맥주를 마시고, 요가를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만 생각했다. 2박3일 정도로 예상했던 여행은 길어져 한 달간 제주도에 머물렀다. 부부의 답은 ‘책’ 그리고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 직장 생활 틈틈이 독서모임에서 활력을 얻던 김 대표는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는 독서 커뮤니티를 만들면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에 책 <당선, 합격, 계급>을 통해 독서 생태계 복원을 외쳤던 장 작가도 ‘홍보대사’로 투입됐다. 장 작가는 “활자와 책은 인간 문명의 기본 단위”라며 “인권, 시장, 운명… 이런 추상적 개념들은 책처럼 긴 글을 통해 논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믐은 장 작가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따온 이름인 동시에 그믐의 운영 방식을 담고 있다. 그믐에서는 누구나 독서모임을 열고 댓글로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단, 한 모임은 29일간 유지된다. 이후 독서 모임은 해산되고, 그간 회원들이 달았던 댓글을 보는 것만 가능하다. 장 작가는 “책 한 권을 읽고 수다를 나누기 충분한 기간을 주되 독서모임이 소수의 ‘친목질’로 변질되는 걸 방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믐은 모든 게 틱톡과 정반대다. 온라인 커뮤니티지만 ‘좋아요’는 없다. 이모티콘도, ‘짤방(웃긴 사진)’도, ‘ㅋㅋㅋ’도 허용되지 않는다. 김 대표는 “길고 깊은 소통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김영하 작가가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소설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짜증난다’는 표현을 못 쓰게 한다고요. 무엇 때문에 분하고 속상한지, 그런데도 마음껏 화낼 수 없는 이유는 뭔지…. 너무 많은 감정을 그 한마디로 대신해버리니까요. ‘좋아요’나 이모티콘도 마찬가지예요. ‘좋아요’ 수가 더 많은 의견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요.”
댓글은 한 번 달면 삭제할 수 없다. 5분간만 수정이 가능하다. 김 대표는 “내가 한 말을 철회하고 싶거나 생각이 달라졌다면 예전의 글을 지워버리는 대신 새로운 댓글을 추가로 적으면 된다”며 “사람은 매일매일 성장하는 존재고, 고통스럽더라도 과거의 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사이트를 만들었을까. 김 대표는 “이런 장치가 없으면 더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안다”고 했다. “하지만 짧고, 자극적인 재미는 세상에 너무 많잖아요. 저희는 깊은 대화로만 주고 받을 수 있는, 다른 가치들을 전하고 싶어요.” 그믐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는 사뭇 비장하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그믐은 작가, 소규모 출판사, 동네책방과의 협업도 늘려나갈 계획이다. 2017년 전자책으로 무료 배포했던 <한국 소설이 좋아서>에 이어 29일 <한국 소설이 좋아서2>를 무료 공개했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이정미 안온북스 대표, 문지혁 소설가 등이 ‘좋은데 남들이 잘 모르는’ 한국 소설을 엄선해 소개하는 책이다. 여기 소개된 작품의 작가들이 그믐에서 독서모임을 순차적으로 연다. 권여름, 염기원, 최양선, 최유안 작가 등이 소설 작품과 글 쓰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장 작가와 김 대표는 매월 음력 29일 그믐이면 전국 동네 책방을 찾아 다양한 독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스타 작가’의 일방향 강연이 아니다. 어떤 책을 함께 읽을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를 그믐에서 함께 정한다. 김 대표는 “새벽녘에야 겨우 볼 수 있는 그믐달처럼, 책 읽는 사람이 갈수록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책을 만들고 또 읽고 있다”며 “그믐은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비추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
아직 본격적으로 운영에 나서지도 않은 그믐에서는 벌써 2000명 넘는 사람들이 이 사이트에 모여 ‘인생 책’을 찾고 있다. 시범 서비스 기간 석 달여 만에 110개 넘는 독서모임이 만들어졌다. 책 읽는 사람이 귀한 시대, 왜 사람들은 그믐으로 모여들었을까.
29일 그믐을 정식 오픈한 김혜정 대표(43)는 “각자 인생을 전력 질주하고 있던 사람들이 잠시 멈춰서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묻도록 하는 게 책의 강점이자 그믐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 질문을 제때 하지 않으면 암흑 같은 시간을 만나게 되거든요.”
15년 차 회사원이었던 김 대표는 지난해 ‘중년의 위기’를 맞았다. 회계 경력을 쌓으며 최고재무책임자(CFO)를 향해 달려가던 때였다. 단순한 번아웃 증후군이 아니었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던 삶인가?’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혔다.
결국 퇴사를 했다. 우울의 늪에 빠져 모든 것에 의욕을 잃은 그를 남편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 장강명 작가가 제주도로 데려갔다. 밤바다를 걷고, 맥주를 마시고, 요가를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만 생각했다. 2박3일 정도로 예상했던 여행은 길어져 한 달간 제주도에 머물렀다. 부부의 답은 ‘책’ 그리고 ‘책 읽는 사람들’이었다. 직장 생활 틈틈이 독서모임에서 활력을 얻던 김 대표는 지역과 세대를 뛰어넘는 독서 커뮤니티를 만들면서 인생의 가치를 찾아나가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에 책 <당선, 합격, 계급>을 통해 독서 생태계 복원을 외쳤던 장 작가도 ‘홍보대사’로 투입됐다. 장 작가는 “활자와 책은 인간 문명의 기본 단위”라며 “인권, 시장, 운명… 이런 추상적 개념들은 책처럼 긴 글을 통해 논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믐은 장 작가의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 따온 이름인 동시에 그믐의 운영 방식을 담고 있다. 그믐에서는 누구나 독서모임을 열고 댓글로 책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단, 한 모임은 29일간 유지된다. 이후 독서 모임은 해산되고, 그간 회원들이 달았던 댓글을 보는 것만 가능하다. 장 작가는 “책 한 권을 읽고 수다를 나누기 충분한 기간을 주되 독서모임이 소수의 ‘친목질’로 변질되는 걸 방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믐은 모든 게 틱톡과 정반대다. 온라인 커뮤니티지만 ‘좋아요’는 없다. 이모티콘도, ‘짤방(웃긴 사진)’도, ‘ㅋㅋㅋ’도 허용되지 않는다. 김 대표는 “길고 깊은 소통을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김영하 작가가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죠. 소설가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는 ‘짜증난다’는 표현을 못 쓰게 한다고요. 무엇 때문에 분하고 속상한지, 그런데도 마음껏 화낼 수 없는 이유는 뭔지…. 너무 많은 감정을 그 한마디로 대신해버리니까요. ‘좋아요’나 이모티콘도 마찬가지예요. ‘좋아요’ 수가 더 많은 의견이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고요.”
댓글은 한 번 달면 삭제할 수 없다. 5분간만 수정이 가능하다. 김 대표는 “내가 한 말을 철회하고 싶거나 생각이 달라졌다면 예전의 글을 지워버리는 대신 새로운 댓글을 추가로 적으면 된다”며 “사람은 매일매일 성장하는 존재고, 고통스럽더라도 과거의 나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왜 이렇게 ‘불편한’ 사이트를 만들었을까. 김 대표는 “이런 장치가 없으면 더 쉽게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안다”고 했다. “하지만 짧고, 자극적인 재미는 세상에 너무 많잖아요. 저희는 깊은 대화로만 주고 받을 수 있는, 다른 가치들을 전하고 싶어요.” 그믐 홈페이지에 적힌 문구는 사뭇 비장하다. “우리가 사라지면 암흑이 찾아온다.”
그믐은 작가, 소규모 출판사, 동네책방과의 협업도 늘려나갈 계획이다. 2017년 전자책으로 무료 배포했던 <한국 소설이 좋아서>에 이어 29일 <한국 소설이 좋아서2>를 무료 공개했다. 한영인 문학평론가, 이정미 안온북스 대표, 문지혁 소설가 등이 ‘좋은데 남들이 잘 모르는’ 한국 소설을 엄선해 소개하는 책이다. 여기 소개된 작품의 작가들이 그믐에서 독서모임을 순차적으로 연다. 권여름, 염기원, 최양선, 최유안 작가 등이 소설 작품과 글 쓰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장 작가와 김 대표는 매월 음력 29일 그믐이면 전국 동네 책방을 찾아 다양한 독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스타 작가’의 일방향 강연이 아니다. 어떤 책을 함께 읽을지,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를 그믐에서 함께 정한다. 김 대표는 “새벽녘에야 겨우 볼 수 있는 그믐달처럼, 책 읽는 사람이 갈수록 없다고는 하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책을 만들고 또 읽고 있다”며 “그믐은 그런 사람들의 목소리를 비추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