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주의의 등장으로 사진가들은 외부에서 찾던 소재와 주제를 작가의 무의식, 꿈, 숨겨진 욕망 등 개인적 세계로 옮길 수 있었다. 그것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지평이었다. 20세기 초중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합성이나 화학적 변형으로 초현실적 이미지를 드러냈다. 그런데 랄프 깁슨은 지극히 일상적인 현실에서 초현실의 이미지를 포착했다. 인물의 표정, 신체, 사물, 빛, 그림자 등을 간결한 구도 속에 강렬하게 교차시켰다.

이 작품은 깁슨이 1970년대 발표한 ‘몽유병자’ 연작의 하나다. 복도, 문, 손 등 현실의 피사체를 담은 것이지만, 방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과 그 때문에 생긴 그림자가 뒤얽혀 기묘한 긴장감이 가득 찼다. 지극히 작가 개인의 무의식과 경험에 바탕을 둔 사진이지만, 관람자들은 기묘한 공감을 느낀다. 몽유병자가 돌아다니는 공간은 현실이자 동시에 꿈의 일부다. 그런데 인생도 그렇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현실이었지만 꿈처럼 손에 닿을 수 없다. 그래서 삶을 꿈에 비유하기도 한다.

깁슨의 작품들은 1일 문을 여는 부산 해운대구 랄프깁슨미술관에서 내년 3월까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올해 말까지 만나볼 수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