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주 관장 "역사·추억 깃든 남산도서관, 남산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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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주년 맞는 남산도서관 변신 이끄는 김양주 관장
카페 같은 '디지털 라운지' 조성
정년 앞둔 교육공무원 마지막 소임
"누구나 힘 얻어가는 공간 되길"
카페 같은 '디지털 라운지' 조성
정년 앞둔 교육공무원 마지막 소임
"누구나 힘 얻어가는 공간 되길"
남산도서관은 서울의 1호 공립도서관이다. 1922년 10월 5일 명동에 문을 열었다. 당시 이름은 경성부립도서관. 옛 한성병원 건물을 고쳐 썼다. 열람석 60석 규모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이렇게 출발한 남산도서관이 5일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3일 만난 김양주 남산도서관장(사진)은 “남산도서관에는 대한민국의 역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개인적인 추억이 서려 있다”며 “새로운 100년을 맞아 남산도서관을 ‘남산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었다. 김 관장은 100년 전 얘기부터 꺼냈다. “일제가 경성부립도서관을 지은 배경에는 3년 전 터진 3·1 운동이 있어요. 우리 국민의 힘에 놀란 일제가 우리를 달래기 위해 도서관을 지은 겁니다. 목적이 불순하더라도 지식과 문화에 목말랐던 당시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단비와도 같았죠.”
소설가 고(故) 박완서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아아, 무정’(레미제라블 아동용 축약판) 등을 읽으며 자란 그는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본 별천지였다”고 회상했다.
남산으로 터를 옮긴 건 1965년이었다. “공공도서관을 왜 교통이 불편한 산 중턱에 짓느냐”고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도 역사의 우여곡절이 작용했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은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터지면서 모든 게 바뀌었죠. 국회가 여의도로 가자, 남산에 도서관을 들인 겁니다.”
교통이 나빠도 사람들은 남산도서관을 찾았다. 숲속에 자리 잡아 조용한 데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등 경관도 수려했기 때문이다. 김 관장은 “1960~1970년대에 남산도서관을 찾았던 까까머리 학생들이 이제 희끗희끗한 머리로 향수에 젖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런 사연은 100주년을 앞두고 벌인 ‘추억 콘텐츠 공모전’에 수두룩하게 쌓였다.
남산도서관의 인기는 여전하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찾는 이가 크게 늘었다. 이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남산 밑 해방촌과 이태원에 외국인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새로운 100년을 맞아 남산도서관은 변신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2층이다. 원래는 신문과 잡지를 보고 컴퓨터를 하던 공간이었다. 올해 공사를 해 이를 카페처럼 바꾸고 ‘디지털 라운지’라고 이름 붙였다. 탁 트인 공간에 푹신푹신한 의자와 소파가 띄엄띄엄 놓였다. 멍하니 앉아 남산을 바라봐도 되고, 노트북을 빌려 인터넷을 해도 좋다. 외국인을 위해 K팝을 들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김 관장은 평생 교육공무원으로 일했다. 서울교육청 노사협력담당관, 노원평생학습관장을 거쳐 올 1월 남산도서관에 왔다. 내년 정년을 맞는 그는 남산도서관을 누구나 와서 쉬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게 공무원으로서의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과거의 도서관이 책을 읽고 자료를 찾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힐링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산도서관도 누구나 와서 힘을 얻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이렇게 출발한 남산도서관이 5일 설립 100주년을 맞는다. 3일 만난 김양주 남산도서관장(사진)은 “남산도서관에는 대한민국의 역사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개인적인 추억이 서려 있다”며 “새로운 100년을 맞아 남산도서관을 ‘남산의 랜드마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와의 인터뷰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었다. 김 관장은 100년 전 얘기부터 꺼냈다. “일제가 경성부립도서관을 지은 배경에는 3년 전 터진 3·1 운동이 있어요. 우리 국민의 힘에 놀란 일제가 우리를 달래기 위해 도서관을 지은 겁니다. 목적이 불순하더라도 지식과 문화에 목말랐던 당시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단비와도 같았죠.”
소설가 고(故) 박완서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린 시절 경성부립도서관에서 ‘아아, 무정’(레미제라블 아동용 축약판) 등을 읽으며 자란 그는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그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꿈도 못 꿔본 별천지였다”고 회상했다.
남산으로 터를 옮긴 건 1965년이었다. “공공도서관을 왜 교통이 불편한 산 중턱에 짓느냐”고 거센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도 역사의 우여곡절이 작용했다. “원래 이승만 대통령은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터지면서 모든 게 바뀌었죠. 국회가 여의도로 가자, 남산에 도서관을 들인 겁니다.”
교통이 나빠도 사람들은 남산도서관을 찾았다. 숲속에 자리 잡아 조용한 데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등 경관도 수려했기 때문이다. 김 관장은 “1960~1970년대에 남산도서관을 찾았던 까까머리 학생들이 이제 희끗희끗한 머리로 향수에 젖어 찾아온다”고 말했다.
이런 사연은 100주년을 앞두고 벌인 ‘추억 콘텐츠 공모전’에 수두룩하게 쌓였다.
남산도서관의 인기는 여전하다.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서 찾는 이가 크게 늘었다. 이 중에는 외국인도 있다. 남산 밑 해방촌과 이태원에 외국인이 많이 살기 때문이다.
새로운 100년을 맞아 남산도서관은 변신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2층이다. 원래는 신문과 잡지를 보고 컴퓨터를 하던 공간이었다. 올해 공사를 해 이를 카페처럼 바꾸고 ‘디지털 라운지’라고 이름 붙였다. 탁 트인 공간에 푹신푹신한 의자와 소파가 띄엄띄엄 놓였다. 멍하니 앉아 남산을 바라봐도 되고, 노트북을 빌려 인터넷을 해도 좋다. 외국인을 위해 K팝을 들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했다.
김 관장은 평생 교육공무원으로 일했다. 서울교육청 노사협력담당관, 노원평생학습관장을 거쳐 올 1월 남산도서관에 왔다. 내년 정년을 맞는 그는 남산도서관을 누구나 와서 쉬는 공간으로 조성하는 게 공무원으로서의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과거의 도서관이 책을 읽고 자료를 찾는 곳이었다면, 지금은 힐링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산도서관도 누구나 와서 힘을 얻어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습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