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민 "난 남들보다 느리지만 포기 안해요…마스터스 72홀 완주가 꿈"
“지금도 석 달 전 장애인 US오픈에서 마지막 퍼트가 들어갈 때의 느낌, 우승이 결정됐을 때 다른 선수들이 뿌려주던 물의 시원함까지 전부 다 기억나요. 그러면 자신감이 막 생겨요. 제네시스 챔피언십에서도 그 느낌을 유지하며 커트 통과에 도전해 보려고요.”

나이지리아 골프연습장에서 드라이버샷을 하는 다섯 살 때의 이승민.  이승민 제공
나이지리아 골프연습장에서 드라이버샷을 하는 다섯 살 때의 이승민. 이승민 제공
이승민(25)에게 2022년 7월은 잊을 수 없는 시간이다. 사상 처음 열린 장애인 US오픈 골프대회에서 연장전까지 치르는 접전 끝에 초대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기 때문이다. 오는 6일부터 열리는 한국프로골프(KPGA) 코리안투어 최대 대회인 제네시스 챔피언십에 도전장을 내민 이승민을 3일 만났다. 그는 “저는 우승해본 선수”라며 “제네시스 챔피언십에서는 매일 1언더파씩 기록해 커트 통과와 4라운드 완주를 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승민은 자폐성 발달장애를 가진 골퍼다. 최근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드라마의 이름을 따 ‘필드의 우영우’로 불린다. 이승민은 인터뷰 내내 기자와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태어난 지 2년 정도 지난 뒤 자폐 판정을 받은 이승민이 처음 골프채를 잡은 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간 나이지리아에서였다. 아버지의 골프채를 휘둘렀는데, 정타를 맞은 골프공이 예쁜 곡선을 그리며 날아간 것. 그 느낌이 짜릿했던 모양이다. 다른 일에 관심이 없고 거의 말을 하지 않던 그였지만, 그날 이후 “골프 하러 가자”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어린이 채널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타이거 우즈가 나오는 골프 채널은 몇 시간 동안 넋 놓고 봤다고 어머니 박지애 씨는 말했다.

초등학교까지 미국에서 아이스하키팀으로 활동했다. 다소 느리고 행동이 남달랐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 ‘끈기 있는 선수상’은 시즌마다 그의 차지였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이승민은 골프로 진로를 바꿨다. 과격한 몸싸움이 필수인 아이스하키에서 요령이 부족했던 이승민은 늘 부상에 시달렸다.

그즈음 이승민은 어린 시절 달고 살았던 얘기를 어머니에게 다시 건넸다. “나 골프 할래.” 이승민은 “공이 제대로 클럽에 맞아 하늘 높이 날아가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고 머릿속이 쾌청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아이스하키로 다진 단단한 하체에 집중력도 좋은 이승민은 골프를 시작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빠르게 성장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4년 세미 프로 자격증을 땄고 2017년 KPGA 코리안투어 정회원이 됐다.

본격적인 전쟁은 이때부터였다. 박지애 씨는 “뒷동산을 하나 넘었더니 에베레스트산이 나왔다”고 했다. ‘프로무대인 만큼 더 잘 쳐야 한다’는 부담감 탓에 가장 자신 있었던 드라이버 샷에 입스가 온 것. 티박스에 올라가는 게 무서웠을 정도였다. 박씨는 “그때 승민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골프를 그만두고 뭘 해야 할지 승민이가 나름대로 고민했던 거죠. 식당, 패스트푸드 가게를 갈 때마다 아르바이트생들을 그렇게 유심히 쳐다보더군요. ‘아르바이트도 전문적인 능력이 필요해. 승민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골프를 계속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달랬죠.(웃음)”

슬럼프를 이겨내는 특효약은 ‘지독한 연습’이었다. 새벽 6시에 연습장에 나가 오후 5시까지 스윙을 다듬고, 그다음엔 체력훈련을 했다. 하루에 드라이버만 1000번 넘게 치기도 했다. 그러자 지난해 초부터 스윙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지난여름에는 미국프로골프(PGA) 콘페리투어 퀄리파잉(Q) 스쿨에도 도전했다. 이승민은 “올 연말에 아시안투어 Q스쿨에 나가고 콘페리투어에는 내년에 다시 도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자폐를 극복한 희망의 아이콘이 되면서 하나금융그룹, SK텔레콤의 후원도 받고 있다.

이승민의 장기는 정확한 드라이버샷이다. 비거리는 290야드로 투어 프로의 평균 수준이지만, 페어웨이 안착률은 73.21%에 이른다. 현재 코리안투어에서 페어웨이 안착률 6위인 방두환(72.93%)보다 높다.

이승민에게 드라이버샷을 똑바로 보내는 비결을 물었다. “페이스 앵글이 방향성을 결정해요. 임팩트 때 왼쪽 손등이 목표물을 향해야 합니다.” 이승민은 수차례 반복해서 기자에게 스윙 동작을 보여주며 이해시키려고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주차장까지 배웅해주며 “임팩트 때 손동작을 기억하라”고 또다시 얘기했다. 자신이 드라이버 입스를 극복한 방법을 기자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그래서 자신처럼 힘들어하지 말고 잘 치라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승민의 꿈은 미국프로골프(PGA) 메이저대회인 마스터스 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다. 마스터스 무대에서 커트를 통과한 뒤 최종일 18번홀 그린에서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홀아웃하고 싶단다. 그는 장애인 US오픈 우승으로 꿈이 하나 더 생겼다고 했다.

“장애인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일반 대회에서도 꼭 한 번 우승하고 싶어요. 저는 남들보다 느리긴 하지만 한번 시작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오래오래 버티거든요.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는 내일 제 골프가 더 발전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