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재명표 기본소득의 함정
지난 9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교섭단체대표 연설을 했다. 정치와 경제를 가로지르는 쟁점이 상당했다. 핵심만 살펴보겠다. 이 대표의 연설은 “정치인은 주권자의 대리인”이라는 규정으로 시작한다. 정치인들이 레토릭으로 쓰는 말이다. 대리인(delegate)은 유권자의 지시에 종속되며 언제든 소환될 수 있다. 권한을 위임받아 임기를 보장받는 대표(representative)와 다르다. 대리인이 운영하는 정부는 여론(국민 다수의 지시)이 입법과 행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로 분류된다.

그런데 ‘여론의 지배’라고 부를 수 있는 직접 민주주의는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로 서유럽 포퓰리즘의 대명사인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30년간 2년에 한 번꼴로 국민투표가 시행됐고, 집권에 성공한 주요 정당들은 인터넷 투표로 강령을 정했다. 촛불정부를 자처하며 직접 민주주의에 집착한 문재인 정부는 여론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라며 최저임금 대폭 인상, 투기꾼 잡는 부동산 대책 등 실패가 예정된 정책을 밀어붙였다.

직접 민주주의는 독재정부로 가는 지름길 역할을 하기도 한다. 구(舊)소련은 공동체마다 대리인을 뽑아 국가 최고결정기구(전국소비에트회의)를 만들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도 비슷한 구조다. 이런 대리 민주주의는 무력을 보유한 대리인이 자신의 의지가 국민의 의지라고 주장할 때 독재로 변모한다. 스탈린이나 시진핑은 일탈이 아니라 필연적 결과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빈곤층의 직접 민주주의를 이용해 독재를 자행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최근 총선에서 네오파시즘 정당이 제1당이 돼 총리를 배출했다.

이 대표의 연설은 ‘기본사회 비전(기본소득)’으로 이어진다. 이미 수많은 논쟁이 있었다. 핵심은 수백조원의 예산이 필요한 기본소득을 정부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노동 공급의 감소를 상쇄할 만한 노동생산성 상승을 이룰 수 있는지다. 이 대표는 이 쟁점에 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경제학적 의미에서 기본소득은 ‘성장을 멈춘 경제’에서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이 발전할 때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방법 중 하나다. 197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미드는 조건 없는 사회배당(기본소득)으로 노동 공급을 줄이는 것이 저임금을 통해 완전고용을 달성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했다. 국민 모두에게 배당을 줄 수 있는 대규모 국유화 또는 그에 버금가는 세금 징수가 전제된다. 미드는 20세기 후반 우울했던 영국 경제를 배경으로 이런 구상을 이야기했다. 즉, 기본소득은 성장이 멈춘 디스토피아에서의 사회 존속을 위한 개혁 정책이다.

이 대표의 기본소득은 맥락이 정반대다. 그는 성장하는 유토피아 세계를 상상한다. 쟁점이 되는 국유화와 증세는 꺼내지도 않는다. 물론 미드와 근거가 다를 수는 있다. 하지만 뭐가 됐든, 경제학적 근거와 제기된 쟁점에 관한 답을 제시해야 토론이 가능하다. ‘기본적 삶’ 같은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하면 곤란하다. 이런 태도는 앞서 본 대리인 규정과도 맥락이 닿아있다. 여론을 따르지 않으면 소환돼야 하는 대리인은 “제한된 조건에서 최대화 문제”(폴 새뮤얼슨)를 푸는 경제학적 고민이 필요 없다. 여론만 따르면 된다. 무한한 자원을 암묵적으로 전제하며 필요한 모든 걸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 그만이다. 이 대표는 “없는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며 국회 연설을 끝냈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길을 의지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갈 수 있는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정치다.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형으로 생각하는 민주주의관과 도덕적 당위를 앞세우는 경제철학은 이 대표만이 아니라 진보 진영 전반이 공유하는 생각이다. 포퓰리즘의 특징이기도 하다. 진지한 토론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