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감사인 지정제, 이제라도 손봐야
2001년 미국 에너지기업 엔론의 초대형 분식회계 사태를 계기로 미국은 이듬해 7월 회계개혁법안인 ‘사베인스-옥슬리법’을 통과시켰다. 기업 공시 수준, 감사인(회계법인)의 독립성, 분식회계 관련자 처벌 강도 등을 대폭 높여 미국 회계투명성을 제고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법안이다.

미국은 입법 과정에서 ‘감사인 의무교체 제도’도 검토했다. 회계법인을 일정 주기로 바꿔 기업과의 유착을 막되 기업에 감사인 선택권은 보장하는 제도다. 결국엔 도입이 유보됐다. 감사인 교체로 발생하는 감사시간 급증 등 비용이 효익보다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갈등 유발하는 新외감법

국내에도 2018년 ‘한국판 사베인스-옥슬리법’이 도입됐다. 신(新)외부감사법이다.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태가 계기가 됐다. “일부 일탈로 대부분의 정상 기업까지 옥좨야 하냐”는 기업들의 반대는 회계투명성 제고라는 명분에 압도됐다. 표준감사시간제, 내부회계관리제도의 외부감사 의무화 등이 도입됐다. ‘감사인 의무교체 제도’보다 훨씬 강력한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도 채택됐다. 상장기업 등이 6년 연속 자율적으로 감사인을 선임하면 다음 3년은 정부가 감사인을 지정해주는 제도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부가 감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법 시행 4년이 지났지만 기업과 회계업계 간 갈등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회계업계는 회계투명성이 제고됐으니 제도를 더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업들이 입맛에 맞는 회계법인을 고르는 ‘회계쇼핑’이 사라지는 등 감사인 독립성도 개선됐다는 것이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도 회계법인 대표들과 만나 “신외감법 시행으로 독립적 외부감사를 수행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강화됐다”고 평가했다.

기업들은 정반대다. 부작용이 심한 ‘단기 스테로이드 처방’이라며 시급히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무엇보다 많은 제도가 한꺼번에 도입되면서 감사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2017년 1억2132만원이었던 상장회사 평균 감사보수는 2021년 2억4192만원으로 두 배로 급증했다.

기업 선택권 높여줘야

법 시행 후 매출이 매년 사상 최대를 경신하고 있는 회계업계의 배만 불리는 제도란 불만도 나온다. 특히 자유수임제를 근간으로 하는 글로벌 추세에 역행하는 주기적 감사인 지정제는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지정감사인의 폭리와 권한 남용이 늘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어느 제도도 당사자들이 강하게 불신하고 반대하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회계투명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라면 기업 목소리를 최대한 반영해 감사 부담을 줄여주고 불합리한 제도도 개선해야 할 때다. 다행히 금융위원회가 최근 기업·회계업계·학계가 참여하는 ‘회계개혁 평가·개선 추진단’을 구성해 신외감법 성과를 평가하고 개선 방안도 마련하기로 해 기업들의 기대가 크다.

감사인 지정제는 당장 폐지가 힘들다면 일정 기간 후 ‘감사인 의무교체 제도’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 미국은 부작용이 더 크다고 보고 유예했지만 그나마 기업에 자율성을 주고 감사인 독립성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이란 견해가 많다. 한국만 정부가 감사인을 정해주는 유일한 나라로 영원히 남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