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즈상' 허준이 부친의 창의교육 "아이가 문제 내고 부모가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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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 인터뷰
11월 2일 인재포럼 특별강연
11월 2일 인재포럼 특별강연
“저는 통계학자라 수학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자식에게 수학을 가르치면 누구보다 잘 가르칠 수 있다고요. 그런데 제 방식으로 수학을 가르친 게 준이(허준이 교수)가 학창시절 수학을 멀리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준이가 순수 수학으로 다시 돌아온 건 대학원에 가서니까,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아버지인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사진)를 최근 고려대에서 만났다. 그는 “부모의 방식을 강요하기보다는 아이의 시행착오를 한 발 뒤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 교수는 오는 11월 2일 ‘글로벌인재포럼 2022’ 특별세션에서 ‘창의적 인재 교육’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다음은 허 교수와의 일문일답.
▷아들을 영재로 키우고 싶었다. 과학고에 입학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수상하고, 하버드 학부에 진학하는 그런 모습도 그렸다. 내가 직접 가르치면 누구보다도 잘 가르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준이가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고, 수학만 빼고 다른 걸 하고 싶어 하더라.
청소년기에 문학·철학에 관심이 쏠린 게 수학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수능을 준비할 때도 유독 수학이 약했다. 언어영역은 거의 항상 만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는데, 오히려 수리영역이 약해 고민이었다. 준이가 다시 수학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가면서 수학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준이가 수학을 진로로 삼길 원했다. 나도 그랬지만, 대다수 부모들은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녀를 압박하는 게 네거티브한 영향이 있다는 걸 잘 모른다. 부모가 너무 원하면 반작용이 생긴다.
▶그러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압박하지 않고 어떻게 자녀를 교육해야 하나.
▷자녀가 몰입할 시간을 줘야 한다. 여유가 없으면 새로운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에 몰입할 시간이 주어져야 이런 창의성이 나온다. 바둑기사인 조훈현 9단의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이 있다. ‘창의성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끈질긴 탐구심의 결과’라는 말이 나온다. 크게 공감한다. 5분 제한시간 동안 한 문제를 푸는 일은 인공지능이 더 잘 한다. 몰입에서 나오는 창의성이 인간의 강점이다. 학교 수학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에도 준이는 1주일 동안 하나의 체스 문제를 붙잡고 늘어졌다. 체스 규칙에 따라 검정 나이트 2개와 흰색 나이트 2개의 위치를 서로 바꾸는 문제다. 주어진 체스판 모양대로만 바라보면 문제를 풀기 어렵다. 나이트는 인간과 다르게 움직여서다. 앞으로 한 칸, 대각선으로 한 칸 움직인다. 준이는 기존 체스판 모양을 뒤바꿔 문제를 단순화했다. 나이트가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처럼 직진할 수 있도록 체스판 모양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판을 바꿔놓으면 누구라도 풀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몰입으로 직관을 발휘한 결과다. 동료 연구자들이 준이의 장점으로 꼽는 게 ‘직관이 좋다’는 점이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논리를 전개한다는 얘기다. 논리를 뛰어넘어 많은 수를 내다보고 직관을 발휘하려면, 깊게 몰입해야 한다.
▶어린 시절 교육은 어때야 할까. 가장 기본이 되는 교육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선 부모와 자녀가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식탁에서, 거실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생이 되면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을 많이 읽는다. 부모들도 학창시절에 한번씩 접해봤겠지만, 자녀와 함께 다시 자세히 읽어보고 식탁에서 같이 얘기해봐야 한다. 아이만 읽어서는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울 것이다.
꼭 책으로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 준이가 어렸을 때 김건모 노래를 듣더라. 나도 같이 들었다. 그 후 김건모의 무슨 노래가 좋은지, 왜 좋은지를 이야기했다. 뉴스를 보고 시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다른 부모들도 듣기·말하기·읽기·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아이가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학원을 보내서 그 능력을 키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 숫자, 알파벳을 떼는 식이다.
▷요즘 부모들은 참 바쁘다. 자녀를 학원에 보낼 비용을 마련하려면 돈을 벌어야 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는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를 더 잘 가르칠 수 있다. 집 안의 티비 크기를 줄이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가구를 배치해야 한다. 눈을 맞춰 대화하면서 듣고 말하기를 연습해야 한다.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을 사교육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허준이 교수는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처지진 않았나.
▷상당히 뒤쳐진 아이었던 게 사실이다. 유치원 참관 수업에 갔다. 30여명의 다른 아이들은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려 발표를 하더라. 준이 혼자만 이름만 써놓고 아무것도 못하더라. 이름 외에는 아직 한글을 몰랐던 것이다. ‘허준이’에서 ‘이’자도 이응과 모음 위치를 서로 바꿔 써놨더라.
▶조바심이 들진 않았나.
▷조바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3000m 경기를 보면, 처음에는 선수들이 답답할 정도로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500m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굉장히 멀리 가야 하는 경기라 처음에 빨리 달리지 않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처음에 쳐지면 영원히 쳐진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런 불안감이 부모들을 사교육으로 내몬다.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스타트를 잘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부모들의 불안감은 어디서 왔을까. 자신들의 어린시절에서 왔을 것 같다. 1970년대에는 한 해에 100만명이 넘는 아이가 태어났다. 100만세대는 경쟁의 시대다. 몇 명을 쳐내더라도 잘 뛰는 사람만 끌고 나갔다. 지금은 한 해 27만명이 태어난다. 100만세대와 27만 세대는 다르다. 부모세대의 불안감으로 아이를 처음부터 전력질주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능동적으로 공부하길 바란다. ‘학습의 능동성’을 키워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에게 수학 학습지 10쪽을 풀라고 할 게 아니다. 가정에서 문제를 내는 사람은 아이, 문제를 푸는 사람은 부모여야 한다. 아이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곧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손자 단이도 부모에게 수학 문제를 낸다. 숫자 100까지 쓰는 법을 배웠는데, 동그라미 수십 개를 그리고 몇 개인지 세보라는 식이다. 단이가 아는 수준에서 한 개씩 일일이 세려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그런데 부모는 곱셈을 활용한다. 4열 6행으로 줄지어진 동그라미가 24개란 걸 금세 안다. 학습지에서 공식을 외우지 않아도, 부모가 하는 걸 보고 아이는 곱셈을 금방 배운다. 부모가 문제를 너무 빨리 푸니까, 단이가 그 다음엔 문제를 비튼다. 동그라미를 예쁘게 줄지어 그리는 게 아니라, 뒤죽박죽 그린 거다. 곱하기로는 풀 수 없는 문제다. 빠트리지 않고 겹치지 않게 세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색연필로 색깔을 달리해서 4개씩 묶어서 칠하면 된다. 그럼 4개, 8개...24개까지 잘 셀 수 있다. 부모가 체계적으로 풀면 어린 아이는 놀라고, 깨닫는다.
▷교육과 평가 방식 보두 문제풀이에 국한돼있다. 접선의 기울기를 구하라는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이런 문제는 너무 편협하다. 학생들은 개념을 말하고 원리가 어떻게 유도돼 나오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원리를 응용해서 어떤 문제에 접급할지 생각해야 한다.
택일형 문제로 평가하기 보단, 오늘 미분을 배웠다면 미분의 개념을 정해서 말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고. 감흥을 주었는지도 말해봐라. 다른 학생이 말하는 걸 들으며 ‘저렇게도 생각하는구나’ 느끼는 거다. 그런 식의 교육이 살아있는 교육 아닌가.
수능같은 택일형의 문제는 참 안 좋다. 수능이 일주일만에 다 채점을 완료하고 통보해야 하니까 현실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한다고들 한다. 난 믿지 않는다. 최근에 기술 발달로 인공지능 문자 인식도 발달돼있고,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처럼 사람이 채점해도 된다.
문제를 만들어보라는 문제도 좋다. 이해도가 높아야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에서 면접을 볼 때도 문제를 내라는 문제를 내곤 한다. 주어진 지문을 쓴 사람이 맞은 편에 있는 교수인데, 그 교수에게 질문을 해보라는 식이다. 제대로된 질문을 하는 학생이 뛰어난 학생이다.
▶암기형 교육도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나는 암기형 교육을 굉장히 좋아한다. 암기식 교육이야 말로 우리나라만의 강점이다. 기억을 게을리하는 건 옳지 않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그에 관한 모든 요소를 뇌에서 불러내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하다.
문제는 왜곡된 암기식 교육이다. 원리와 맥락을 모르고 단순히 암기하는 게 문제다. 갑오경장이 1894년에 일어났다는 사실만 암기하는 건 나쁜 암기다. 하지만 구한말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갑오경장이 몇 년에 발생했고, 그 전후로 무슨 사건들이 왜 있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바뀌어야 할 점이 있을까.
▷일타강사의 인터넷 강의가 잘못됐다. 최고로 잘한다는 한 사람이 전체 시장을 석권해 몇 만명을 가르치는 건 정말 잘못 된 방식이다. 교사도 다양해야 하고, 클래스 사이즈는 작아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서로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제일 약한 게 자신의 지식을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말하기다.
앞으로 대학이 해줘야 할 역할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곳’이다. 인터넷, 유튜브로 공부한 걸 학생들이 대학에서 만나서 말하고 들으며 공유해야 한다.
▷준이는 ‘구불구불한 길이었지만, 최적의 경로였다’고 했다. 준이는 수학자지만 인문적인 소양이 굉장히 강하다. 시인을 꿈꾸기도 했고,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고, 고교 자퇴 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서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었다. 학부 시절에는 철학 수업도 찾아들었다.
준이의 학업 과정, 커리어에서 그런 인문적 소양이 평가되거나 드러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준이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그동안 평가받지 않았던 인문적 소양에 있다고 본다.
▶한 가지 진로에 도달하기 위한 정해진 길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인가.
▷자신의 컴포트 존이 아닌 곳에서 깨져봐야 한다. 대학생들 중 평점 4.0이 넘는 학생을 보면 일단 의심하고 본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만 머물면서 학점을 관리했을 거라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통계학과 전공 수업을 잘 듣고 경영학과의 경영통계를 듣는 학생도 있다. 들을 필요가 없는 쉬운 수업을 학점 잘 받기 위해 듣는 경우다.
통계학과에서 평점 4.0이 넘는 학생이 있다면, 다음 학기엔 물리학과에 가서 양자역학 수업을 듣거나, 경제학과 미시경제학을 들어보라고 한다. D를 맞아봐야 한다. 만약 거기서 A플러스를 맞는다면? 물리학이나 경제학이 더 맞을 수도 있다. 뭔가 깨진 흔적이 없는 기록은 의심스럽다. 도전정신이 없다는 의미다.
준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깨져봤다. 이걸 배운 다음에 뭐에 관심이 생기는지가 중요하다. 디딤돌을 일단 딛고 나면, 그 다음 돌은 어디에 놓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 자녀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앞으로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시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수학은 혼자 도서관에 파묻혀 열심히 하는 수학이었다. 준이가 하는 수학은 완전히 다르더라. 여러 명이 모여 생각을 나누고, 각자 가진 퍼즐 조각을 끼워맞춰 큰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오늘날 현대 수학에선 아무리 똑똑한 개인이어도 작은 문제밖에 풀 수 없다. 큰 문제는 여러명이 공동으로 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
수학자로서 준이의 첫 번째 업적은 혼자 이룬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전부 다 공동연구자와 같이 이룬 결과다. 앞으로의 아이들은 협력과 공유를 통해서 업적을 이룰 것이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
한국계 최초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을 받은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아버지인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사진)를 최근 고려대에서 만났다. 그는 “부모의 방식을 강요하기보다는 아이의 시행착오를 한 발 뒤에서 지켜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허 교수는 오는 11월 2일 ‘글로벌인재포럼 2022’ 특별세션에서 ‘창의적 인재 교육’에 대해 강연할 예정이다. 다음은 허 교수와의 일문일답.
"자녀에 몰입할 시간 줘야"
▶평생 통계학자로서 수학을 다뤄왔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수학을 교육할 때는 한 발 물러서야 했나.▷아들을 영재로 키우고 싶었다. 과학고에 입학해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수상하고, 하버드 학부에 진학하는 그런 모습도 그렸다. 내가 직접 가르치면 누구보다도 잘 가르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곧 준이가 수학에 대한 흥미를 잃고, 수학만 빼고 다른 걸 하고 싶어 하더라.
청소년기에 문학·철학에 관심이 쏠린 게 수학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수능을 준비할 때도 유독 수학이 약했다. 언어영역은 거의 항상 만점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는데, 오히려 수리영역이 약해 고민이었다. 준이가 다시 수학으로 돌아오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렸다.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 가면서 수학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준이가 수학을 진로로 삼길 원했다. 나도 그랬지만, 대다수 부모들은 부모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녀를 압박하는 게 네거티브한 영향이 있다는 걸 잘 모른다. 부모가 너무 원하면 반작용이 생긴다.
▶그러면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가. 압박하지 않고 어떻게 자녀를 교육해야 하나.
▷자녀가 몰입할 시간을 줘야 한다. 여유가 없으면 새로운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에 몰입할 시간이 주어져야 이런 창의성이 나온다. 바둑기사인 조훈현 9단의 ‘고수의 생각법’이라는 책이 있다. ‘창의성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와 끈질긴 탐구심의 결과’라는 말이 나온다. 크게 공감한다. 5분 제한시간 동안 한 문제를 푸는 일은 인공지능이 더 잘 한다. 몰입에서 나오는 창의성이 인간의 강점이다. 학교 수학에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할 때에도 준이는 1주일 동안 하나의 체스 문제를 붙잡고 늘어졌다. 체스 규칙에 따라 검정 나이트 2개와 흰색 나이트 2개의 위치를 서로 바꾸는 문제다. 주어진 체스판 모양대로만 바라보면 문제를 풀기 어렵다. 나이트는 인간과 다르게 움직여서다. 앞으로 한 칸, 대각선으로 한 칸 움직인다. 준이는 기존 체스판 모양을 뒤바꿔 문제를 단순화했다. 나이트가 인간이 움직이는 방식처럼 직진할 수 있도록 체스판 모양을 재구성한 것이다. 이렇게 판을 바꿔놓으면 누구라도 풀 수 있는 문제가 된다. 몰입으로 직관을 발휘한 결과다. 동료 연구자들이 준이의 장점으로 꼽는 게 ‘직관이 좋다’는 점이다.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논리를 전개한다는 얘기다. 논리를 뛰어넘어 많은 수를 내다보고 직관을 발휘하려면, 깊게 몰입해야 한다.
문제를 내는 건 아이, 푸는 건 부모
▶어린 시절 교육은 어때야 할까. 가장 기본이 되는 교육은 무엇인가.
▷가장 기본은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이다. 이런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선 부모와 자녀가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식탁에서, 거실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학생이 되면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을 많이 읽는다. 부모들도 학창시절에 한번씩 접해봤겠지만, 자녀와 함께 다시 자세히 읽어보고 식탁에서 같이 얘기해봐야 한다. 아이만 읽어서는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울 것이다.
꼭 책으로만 얘기하는 건 아니다. 준이가 어렸을 때 김건모 노래를 듣더라. 나도 같이 들었다. 그 후 김건모의 무슨 노래가 좋은지, 왜 좋은지를 이야기했다. 뉴스를 보고 시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다른 부모들도 듣기·말하기·읽기·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 아이가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학원을 보내서 그 능력을 키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 숫자, 알파벳을 떼는 식이다.
▷요즘 부모들은 참 바쁘다. 자녀를 학원에 보낼 비용을 마련하려면 돈을 벌어야 된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는 부모들이 가정에서 자녀를 더 잘 가르칠 수 있다. 집 안의 티비 크기를 줄이고, 마주 앉아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가구를 배치해야 한다. 눈을 맞춰 대화하면서 듣고 말하기를 연습해야 한다. 부모가 해야 할 역할을 사교육에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허준이 교수는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처지진 않았나.
▷상당히 뒤쳐진 아이었던 게 사실이다. 유치원 참관 수업에 갔다. 30여명의 다른 아이들은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려 발표를 하더라. 준이 혼자만 이름만 써놓고 아무것도 못하더라. 이름 외에는 아직 한글을 몰랐던 것이다. ‘허준이’에서 ‘이’자도 이응과 모음 위치를 서로 바꿔 써놨더라.
▶조바심이 들진 않았나.
▷조바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3000m 경기를 보면, 처음에는 선수들이 답답할 정도로 빈둥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500m 경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굉장히 멀리 가야 하는 경기라 처음에 빨리 달리지 않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처음에 쳐지면 영원히 쳐진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이런 불안감이 부모들을 사교육으로 내몬다. 하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스타트를 잘하는 건 중요하지 않다.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부모들의 불안감은 어디서 왔을까. 자신들의 어린시절에서 왔을 것 같다. 1970년대에는 한 해에 100만명이 넘는 아이가 태어났다. 100만세대는 경쟁의 시대다. 몇 명을 쳐내더라도 잘 뛰는 사람만 끌고 나갔다. 지금은 한 해 27만명이 태어난다. 100만세대와 27만 세대는 다르다. 부모세대의 불안감으로 아이를 처음부터 전력질주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모든 부모들은 자녀가 능동적으로 공부하길 바란다. ‘학습의 능동성’을 키워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이에게 수학 학습지 10쪽을 풀라고 할 게 아니다. 가정에서 문제를 내는 사람은 아이, 문제를 푸는 사람은 부모여야 한다. 아이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과제를 설정해야 한다.
곧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손자 단이도 부모에게 수학 문제를 낸다. 숫자 100까지 쓰는 법을 배웠는데, 동그라미 수십 개를 그리고 몇 개인지 세보라는 식이다. 단이가 아는 수준에서 한 개씩 일일이 세려면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그런데 부모는 곱셈을 활용한다. 4열 6행으로 줄지어진 동그라미가 24개란 걸 금세 안다. 학습지에서 공식을 외우지 않아도, 부모가 하는 걸 보고 아이는 곱셈을 금방 배운다. 부모가 문제를 너무 빨리 푸니까, 단이가 그 다음엔 문제를 비튼다. 동그라미를 예쁘게 줄지어 그리는 게 아니라, 뒤죽박죽 그린 거다. 곱하기로는 풀 수 없는 문제다. 빠트리지 않고 겹치지 않게 세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색연필로 색깔을 달리해서 4개씩 묶어서 칠하면 된다. 그럼 4개, 8개...24개까지 잘 셀 수 있다. 부모가 체계적으로 풀면 어린 아이는 놀라고, 깨닫는다.
"암기형 교육 좋아해"...'무맥락 암기'가 문제일뿐
▶수능으로 대표되는 공교육의 평가 방식은 스스로 과제 설정하는 능력을 평가하지 못하는 것 같다.▷교육과 평가 방식 보두 문제풀이에 국한돼있다. 접선의 기울기를 구하라는 수학 문제를 푸는 방식이다. 이런 문제는 너무 편협하다. 학생들은 개념을 말하고 원리가 어떻게 유도돼 나오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원리를 응용해서 어떤 문제에 접급할지 생각해야 한다.
택일형 문제로 평가하기 보단, 오늘 미분을 배웠다면 미분의 개념을 정해서 말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고. 감흥을 주었는지도 말해봐라. 다른 학생이 말하는 걸 들으며 ‘저렇게도 생각하는구나’ 느끼는 거다. 그런 식의 교육이 살아있는 교육 아닌가.
수능같은 택일형의 문제는 참 안 좋다. 수능이 일주일만에 다 채점을 완료하고 통보해야 하니까 현실적으로 그런 형태를 취한다고들 한다. 난 믿지 않는다. 최근에 기술 발달로 인공지능 문자 인식도 발달돼있고,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처럼 사람이 채점해도 된다.
문제를 만들어보라는 문제도 좋다. 이해도가 높아야 문제를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에서 면접을 볼 때도 문제를 내라는 문제를 내곤 한다. 주어진 지문을 쓴 사람이 맞은 편에 있는 교수인데, 그 교수에게 질문을 해보라는 식이다. 제대로된 질문을 하는 학생이 뛰어난 학생이다.
▶암기형 교육도 문제로 지적되곤 한다.
▷나는 암기형 교육을 굉장히 좋아한다. 암기식 교육이야 말로 우리나라만의 강점이다. 기억을 게을리하는 건 옳지 않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는 그에 관한 모든 요소를 뇌에서 불러내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기억이 중요하다.
문제는 왜곡된 암기식 교육이다. 원리와 맥락을 모르고 단순히 암기하는 게 문제다. 갑오경장이 1894년에 일어났다는 사실만 암기하는 건 나쁜 암기다. 하지만 구한말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하려면 갑오경장이 몇 년에 발생했고, 그 전후로 무슨 사건들이 왜 있었는지도 알아야 한다.
▶또 우리나라 교육계에서 바뀌어야 할 점이 있을까.
▷일타강사의 인터넷 강의가 잘못됐다. 최고로 잘한다는 한 사람이 전체 시장을 석권해 몇 만명을 가르치는 건 정말 잘못 된 방식이다. 교사도 다양해야 하고, 클래스 사이즈는 작아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서로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제일 약한 게 자신의 지식을 설명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말하기다.
앞으로 대학이 해줘야 할 역할도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는 곳’이다. 인터넷, 유튜브로 공부한 걸 학생들이 대학에서 만나서 말하고 들으며 공유해야 한다.
평점 4.0 넘는 대학생? 깨져봐야 해
▶진로와 적성은 어떻게 찾아야 할까. 허준이 교수도 학창시절 수학에 흥미를 잃었다가 다시 대학원에서 수학을 하지 않았나.▷준이는 ‘구불구불한 길이었지만, 최적의 경로였다’고 했다. 준이는 수학자지만 인문적인 소양이 굉장히 강하다. 시인을 꿈꾸기도 했고,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고, 고교 자퇴 후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서가에서 자유롭게 책을 읽었다. 학부 시절에는 철학 수업도 찾아들었다.
준이의 학업 과정, 커리어에서 그런 인문적 소양이 평가되거나 드러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준이가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그동안 평가받지 않았던 인문적 소양에 있다고 본다.
▶한 가지 진로에 도달하기 위한 정해진 길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인가.
▷자신의 컴포트 존이 아닌 곳에서 깨져봐야 한다. 대학생들 중 평점 4.0이 넘는 학생을 보면 일단 의심하고 본다.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에만 머물면서 학점을 관리했을 거라는 의심이다. 예를 들어, 통계학과 전공 수업을 잘 듣고 경영학과의 경영통계를 듣는 학생도 있다. 들을 필요가 없는 쉬운 수업을 학점 잘 받기 위해 듣는 경우다.
통계학과에서 평점 4.0이 넘는 학생이 있다면, 다음 학기엔 물리학과에 가서 양자역학 수업을 듣거나, 경제학과 미시경제학을 들어보라고 한다. D를 맞아봐야 한다. 만약 거기서 A플러스를 맞는다면? 물리학이나 경제학이 더 맞을 수도 있다. 뭔가 깨진 흔적이 없는 기록은 의심스럽다. 도전정신이 없다는 의미다.
준이는 다양한 분야에서 많이 깨져봤다. 이걸 배운 다음에 뭐에 관심이 생기는지가 중요하다. 디딤돌을 일단 딛고 나면, 그 다음 돌은 어디에 놓여야 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 자녀 교육을 고민하는 학부모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앞으로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시대가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아는 수학은 혼자 도서관에 파묻혀 열심히 하는 수학이었다. 준이가 하는 수학은 완전히 다르더라. 여러 명이 모여 생각을 나누고, 각자 가진 퍼즐 조각을 끼워맞춰 큰 문제를 해결하는 식이다. 오늘날 현대 수학에선 아무리 똑똑한 개인이어도 작은 문제밖에 풀 수 없다. 큰 문제는 여러명이 공동으로 풀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에서도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중요하다.
수학자로서 준이의 첫 번째 업적은 혼자 이룬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전부 다 공동연구자와 같이 이룬 결과다. 앞으로의 아이들은 협력과 공유를 통해서 업적을 이룰 것이다.
최예린 기자 rambut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