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고전평론가 고미숙 "내 청춘은 참 한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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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함백탄광 광부의 딸, 청년 시절 실패의 연속
상대성원리, 양자역학 등 공부하면서 동서양 접목 고전평론가 고미숙(62)은 치열하게 산다.
동양 고전을 전공으로 했으면서도 아인슈타인을 공부하면서 동서양 학문을 넘나들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하루에 두 번씩 강연할 정도로 자기 생각을 세상에 전하는 데도 열심이다.
그런 그도 대학 시절에는 열정이 없는 한심한 세월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최근에 '청년 붓다'라는 책을 냈는데. 방황하는 젊은이에게는 붓다의 철학이 도움 될 수 있다고 했다.
고미숙은 고려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으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국문학박사 학위를 받긴 했지만 역시 취업에 실패했다.
그래서 공부 공동체 '수유연구실'을 열어 집단적인 공부를 해왔다.
현재는 공부 공동체인 '감이당'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공간',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그는 최근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감이당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말했다.
--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은 어떠했나.
▲ 나는 광부의 딸이다.
그래서 유복하지는 않았다.
저의 집은 강원도 정선군 함백탄광 사택이었는데, 단칸방에 아홉 식구가 살았다.
어머니에게는 너무 쓰라린 시집살이였다.
가난 때문에 괴롭다기보다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 등 불화가 큰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때도 막연히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나마 생활은 됐지만 내 친구들은 극빈자들이었다.
도시락을 못 싸 오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프다.
-- 중고교 시절은 어떻게 지냈나.
▲ 중학교 때에는 남자중학교와 여자중학교가 분리되면서 3년 내내 삽과 곡괭이, 리어카 등으로 운동장 개간을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나서 한 육체적 노동의 대부분을 그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손에 굳은살이 배겨서 손이 두껍게 됐다.
손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고 또 터지고 해서 생긴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춘천여고로 진학했다.
고교 시절에는 입시에 몰두했다.
- 대학 시절을 기억한다면.
▲ 참 한심한 청춘이었다.
춘천여고 졸업 후 고려대 어문계열에 입학해서 독문과를 선택했는데, 막막하게 방황했다.
나는 학생운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 능력이 있고 활발한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하는데, 나는 그럴만한 토대(자질)가 안됐다.
다만 종교에 관심이 있어서 종교 서적을 많이 봤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명동성당 근처에 있는 조그만 모임에서 했다.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시드는 청춘이었다.
청춘의 활기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독문과를 선택한 것도 이 학과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어문계열 중에 선택하고 싶은 학과가 없었다.
당시 나의 관심은 동양학이어서 중어중문학과를 가야 하는데, 중문과 교수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그 학과를 나와도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공부했던 독일어 쪽을 선택했다.
독일어가 인생에 한 번도 유용하게 쓰인 적이 없다.
-- 대학원은 왜 국문과로 갔나.
▲ 대학교 4학년 때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던 선생님의 강의가 국문과에 있었다.
선택과목으로 그 강의를 들었다.
그때 고전문학에 매료됐다.
흠뻑 빠진 것이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은 했는데. 취직이 너무 안 됐다.
간신히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에 들어가긴 했다.
그런데 나는 독문과를 나왔다고 해서 온종일 독일어 사전 원고를 봐야 했다.
결국, 8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리고 대학원 시험 준비를 했는데. 한 달 동안 거의 수행하듯이 공부했다.
-- 박사 학위를 받고서도 교수가 되지 않았는데.
▲ 동료들 모두가 교수가 됐는데 나는 안됐다.
3년 정도 지나서 포기선언을 했다.
절대로 이력서를 안 내기로 작정했다.
그때가 30대 후반이었다.
당시에는 대학교수가 되려면 심사위원들에게 연구업적 자료를 보내야 했는데, 한 박스가 넘었다.
이력서를 쓰고 시험강의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교수가 될 사람은 이미 내정돼 있었다.
학문적 능력은 당락에 부차적인 요소였다.
-- 그래서 공부 공동체를 만들었나.
▲ 갈 곳이 없었다.
이제 대학원에 갈 수도 없고, 집에서 공부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시험공부가 아닌 모든 공부는 토론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지금도 혼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이는 전 세계 역사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도 끊임없는 상호토론이 없으면 지식 생산이 불가능하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토론 분위기에 있었고 가치관도 그러했기 때문에 공부 공동체 수유연구실을 열었다.
수유리 근처 강북구청 매점사무실을 임대했다.
당시 논술 지도로 목돈이 조금 있었기에 보증금 지급이 가능했다.
책상은 길거리에서 주웠다.
이후에 사람이 많아져 대학로로 갔다가 해방촌으로 이사했다.
그 당시 함께 공부하는 회원은 60∼70명이나 됐고 세미나를 하는 사람은 200∼300명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다 보니 생각들의 갈래가 생겼고 이는 분할로 이어졌다.
나는 동양 의학·역학 고전을 좀 더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곳 감이당으로 왔다.
-- 취미는 무엇인가.
▲ 취미는 따로 없다.
다만 시간이 나면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에 1∼2시간은 남산에서 산책한다.
북한산. 도봉산 등산도 한다.
걷기는 혼자 하지 않는다.
혼자 하면 심심하다.
내가 외향적 성격은 아닌데, 고독하게 있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 걷는 것 외에는 많이 잔다.
오후 10시 전후에 잠들어서 아침 6시쯤에 일어난다.
나는 의식적으로 밤에 일을 안 한다.
그전에는 밤늦게까지 리포트를 쓰곤 했는데.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대신, 낮에는 집중한다.
건강이 안 좋은 때가 있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돈이 없었고 식비를 아껴야 했다.
그래서 밥을 같이 해 먹게 됐는데, 이런 공동체 생활 때문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다.
공동체 생활 리듬을 만드는 것은 세미나를 하는 것보다 100배는 힘들었다.
사람들 각각의 습관이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이 곤두섰고 건강이 안 좋아졌다.
그때 동의보감을 만났다.
몸을 순환시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효과를 봤다.
그래서 동의보감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독서를 한다면 주로 동양 고전을 읽는가.
▲ 과학책도 읽는다.
아인슈타인 이론, 양자역학 등을 읽는다.
번역으로 된 책 외에 영어로 된 유튜브 영상으로 공부하기도 한다.
과학 다큐멘터리인데, 정말 최고의 작품들이다.
그것으로 세미나도 하고 강의도 한다.
-- 과학이 동양 고전과 무슨 관계인가.
▲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최근의 지성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불교와 양자역학이 교차하는 것이 인류 지성사의 최첨단이다.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양자역학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는 동양의 주역, 노자, 불교에서 말하는 통찰과 통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철학이라고 하면 독일 철학이었다.
이것이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로 넘어갔고 1960년대 이후에는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이었다.
그 이후에는 세계 지성을 자극하는 스타 철학자들이 안 나오고 있다.
서양철학은 이제 나갈 만큼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양자역학 등이다.
이것이 동양철학과 교차하는 것이다.
-- 최근에 '청년 붓다'라는 책도 내셨는데. 인생 자체가 허망한 것 아닌가.
▲ 삶 자체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끊임없이 살고 죽고를 반복하는 생명체의 맹목성, 그것이 주는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이 동양 현자들이 고민했던 대목이다.
붓다가 그랬고, 공자와 노자도 그랬다.
왜 계속 자기 증식을 하지?, 왜 낳고 또 낳아야 하지?, 왜 욕망을 계속 채워야 하지?, 언제 행복하고 언제 안락을 누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답이 안 나온다.
은둔해도 나오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안 된다.
끝이 없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옛날부터 끊임없이 이 질문을 해왔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맹목과 허무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집착하고 추구하고 꿈꾸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그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붓다는 그 문제를 탐구했고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때가 35세였다.
청년의 파토스(감성)는 이토록 대단한 것이다.
붓다는 나머지 45년을 그 진리 전달에 썼다.
요즘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허무를 느끼고 삶의 의지도 떨어지곤 하는데, 그때 최고의 멘토는 청년기 붓다라고 생각한다.
--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높은가.
▲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감이당 여성들의 공부 밀도나 강도는 대학원생보다 훨씬 강하다.
감이당은 주역 전체를 암기하는 게 기본방침인데, 다들 기꺼이 참여한다.
나는 21세기 문명의 주인공은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산업자본은 남성의 근육을 요구한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에서는 파워보다는 연결이 중요하다.
그래서 여성은 더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남성들도 장점이 있다.
일단 마음을 먹으면 엄청난 추진력이 있다.
그래서 빨리 자기 철학을 하고 책을 낸다.
-- 정치인이나 사회지도층이 읽어야 할 고전이 있다면 무엇인가.
▲ 나는 정치인에 관심이 많지는 않다.
물론, 정치 현장에 뛰어들어 열심히 하는 분들을 존중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진흙탕에서 애쓰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큰 스트레스이겠는가.
그런데 디지털시대에는 정치 영역이 많이 축소된다.
시스템 자체가 알아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시스템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중국에서도 루쉰은 국민작가이긴 하지만 비정치적이다.
그는 정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지적해서 국민작가가 됐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의 문제를 보는 것이 내 스타일에 맞는다.
-- 본인 삶은 성공적인가.
▲ 성공이라는 표현은 너무 빈약하다.
원하던 삶의 형식을 갖췄다는 점에서 나는 충만하다.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나의 정신적 자산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복을 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혜롭고 유머가 넘치는 노년을 살다가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연합뉴스
상대성원리, 양자역학 등 공부하면서 동서양 접목 고전평론가 고미숙(62)은 치열하게 산다.
동양 고전을 전공으로 했으면서도 아인슈타인을 공부하면서 동서양 학문을 넘나들고 있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는 하루에 두 번씩 강연할 정도로 자기 생각을 세상에 전하는 데도 열심이다.
그런 그도 대학 시절에는 열정이 없는 한심한 세월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최근에 '청년 붓다'라는 책을 냈는데. 방황하는 젊은이에게는 붓다의 철학이 도움 될 수 있다고 했다.
고미숙은 고려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했으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국문학박사 학위를 받긴 했지만 역시 취업에 실패했다.
그래서 공부 공동체 '수유연구실'을 열어 집단적인 공부를 해왔다.
현재는 공부 공동체인 '감이당'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공간',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등 20여 권의 책을 냈다.
그는 최근 서울 중구 필동에 있는 감이당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말했다.
--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은 어떠했나.
▲ 나는 광부의 딸이다.
그래서 유복하지는 않았다.
저의 집은 강원도 정선군 함백탄광 사택이었는데, 단칸방에 아홉 식구가 살았다.
어머니에게는 너무 쓰라린 시집살이였다.
가난 때문에 괴롭다기보다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 등 불화가 큰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그때도 막연히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나마 생활은 됐지만 내 친구들은 극빈자들이었다.
도시락을 못 싸 오고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프다.
-- 중고교 시절은 어떻게 지냈나.
▲ 중학교 때에는 남자중학교와 여자중학교가 분리되면서 3년 내내 삽과 곡괭이, 리어카 등으로 운동장 개간을 해야 했다.
내가 태어나서 한 육체적 노동의 대부분을 그때 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손에 굳은살이 배겨서 손이 두껍게 됐다.
손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지고 또 터지고 해서 생긴 것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춘천여고로 진학했다.
고교 시절에는 입시에 몰두했다.
- 대학 시절을 기억한다면.
▲ 참 한심한 청춘이었다.
춘천여고 졸업 후 고려대 어문계열에 입학해서 독문과를 선택했는데, 막막하게 방황했다.
나는 학생운동도 하지 않았다.
뭔가 능력이 있고 활발한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하는데, 나는 그럴만한 토대(자질)가 안됐다.
다만 종교에 관심이 있어서 종교 서적을 많이 봤다.
그것도 체계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명동성당 근처에 있는 조그만 모임에서 했다.
학교 수업에 열심히 참여한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시드는 청춘이었다.
청춘의 활기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독문과를 선택한 것도 이 학과가 좋아서가 아니었다.
어문계열 중에 선택하고 싶은 학과가 없었다.
당시 나의 관심은 동양학이어서 중어중문학과를 가야 하는데, 중문과 교수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그 학과를 나와도 희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공부했던 독일어 쪽을 선택했다.
독일어가 인생에 한 번도 유용하게 쓰인 적이 없다.
-- 대학원은 왜 국문과로 갔나.
▲ 대학교 4학년 때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던 선생님의 강의가 국문과에 있었다.
선택과목으로 그 강의를 들었다.
그때 고전문학에 매료됐다.
흠뻑 빠진 것이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은 했는데. 취직이 너무 안 됐다.
간신히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에 들어가긴 했다.
그런데 나는 독문과를 나왔다고 해서 온종일 독일어 사전 원고를 봐야 했다.
결국, 8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리고 대학원 시험 준비를 했는데. 한 달 동안 거의 수행하듯이 공부했다.
-- 박사 학위를 받고서도 교수가 되지 않았는데.
▲ 동료들 모두가 교수가 됐는데 나는 안됐다.
3년 정도 지나서 포기선언을 했다.
절대로 이력서를 안 내기로 작정했다.
그때가 30대 후반이었다.
당시에는 대학교수가 되려면 심사위원들에게 연구업적 자료를 보내야 했는데, 한 박스가 넘었다.
이력서를 쓰고 시험강의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교수가 될 사람은 이미 내정돼 있었다.
학문적 능력은 당락에 부차적인 요소였다.
-- 그래서 공부 공동체를 만들었나.
▲ 갈 곳이 없었다.
이제 대학원에 갈 수도 없고, 집에서 공부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시험공부가 아닌 모든 공부는 토론하면서 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지금도 혼자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이는 전 세계 역사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도 끊임없는 상호토론이 없으면 지식 생산이 불가능하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토론 분위기에 있었고 가치관도 그러했기 때문에 공부 공동체 수유연구실을 열었다.
수유리 근처 강북구청 매점사무실을 임대했다.
당시 논술 지도로 목돈이 조금 있었기에 보증금 지급이 가능했다.
책상은 길거리에서 주웠다.
이후에 사람이 많아져 대학로로 갔다가 해방촌으로 이사했다.
그 당시 함께 공부하는 회원은 60∼70명이나 됐고 세미나를 하는 사람은 200∼300명에 이르렀다.
사람이 많다 보니 생각들의 갈래가 생겼고 이는 분할로 이어졌다.
나는 동양 의학·역학 고전을 좀 더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곳 감이당으로 왔다.
-- 취미는 무엇인가.
▲ 취미는 따로 없다.
다만 시간이 나면 걷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에 1∼2시간은 남산에서 산책한다.
북한산. 도봉산 등산도 한다.
걷기는 혼자 하지 않는다.
혼자 하면 심심하다.
내가 외향적 성격은 아닌데, 고독하게 있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부터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나.
▲ 걷는 것 외에는 많이 잔다.
오후 10시 전후에 잠들어서 아침 6시쯤에 일어난다.
나는 의식적으로 밤에 일을 안 한다.
그전에는 밤늦게까지 리포트를 쓰곤 했는데. 무리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됐다.
대신, 낮에는 집중한다.
건강이 안 좋은 때가 있었다.
공부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돈이 없었고 식비를 아껴야 했다.
그래서 밥을 같이 해 먹게 됐는데, 이런 공동체 생활 때문에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썼다.
공동체 생활 리듬을 만드는 것은 세미나를 하는 것보다 100배는 힘들었다.
사람들 각각의 습관이 천양지차이기 때문이다.
나는 신경이 곤두섰고 건강이 안 좋아졌다.
그때 동의보감을 만났다.
몸을 순환시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효과를 봤다.
그래서 동의보감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독서를 한다면 주로 동양 고전을 읽는가.
▲ 과학책도 읽는다.
아인슈타인 이론, 양자역학 등을 읽는다.
번역으로 된 책 외에 영어로 된 유튜브 영상으로 공부하기도 한다.
과학 다큐멘터리인데, 정말 최고의 작품들이다.
그것으로 세미나도 하고 강의도 한다.
-- 과학이 동양 고전과 무슨 관계인가.
▲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최근의 지성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불교와 양자역학이 교차하는 것이 인류 지성사의 최첨단이다.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양자역학의 표현이다.
그런데 이는 동양의 주역, 노자, 불교에서 말하는 통찰과 통한다.
내가 어렸을 때는 철학이라고 하면 독일 철학이었다.
이것이 마르크스, 포이에르바하로 넘어갔고 1960년대 이후에는 사르트르, 푸코, 들뢰즈 등이었다.
그 이후에는 세계 지성을 자극하는 스타 철학자들이 안 나오고 있다.
서양철학은 이제 나갈 만큼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양자역학 등이다.
이것이 동양철학과 교차하는 것이다.
-- 최근에 '청년 붓다'라는 책도 내셨는데. 인생 자체가 허망한 것 아닌가.
▲ 삶 자체가 허망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끊임없이 살고 죽고를 반복하는 생명체의 맹목성, 그것이 주는 허무에서 벗어나는 길이 동양 현자들이 고민했던 대목이다.
붓다가 그랬고, 공자와 노자도 그랬다.
왜 계속 자기 증식을 하지?, 왜 낳고 또 낳아야 하지?, 왜 욕망을 계속 채워야 하지?, 언제 행복하고 언제 안락을 누릴 수 있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답이 안 나온다.
은둔해도 나오지 않고 모든 것을 다 가져도 안 된다.
끝이 없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옛날부터 끊임없이 이 질문을 해왔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맹목과 허무에서 벗어나려면 우리가 집착하고 추구하고 꿈꾸는 게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한다.
그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허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붓다는 그 문제를 탐구했고 궁극의 깨달음에 도달했다.
그때가 35세였다.
청년의 파토스(감성)는 이토록 대단한 것이다.
붓다는 나머지 45년을 그 진리 전달에 썼다.
요즘 청소년들이 방황하고 허무를 느끼고 삶의 의지도 떨어지곤 하는데, 그때 최고의 멘토는 청년기 붓다라고 생각한다.
-- 고전을 공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성의 비중이 높은가.
▲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감이당 여성들의 공부 밀도나 강도는 대학원생보다 훨씬 강하다.
감이당은 주역 전체를 암기하는 게 기본방침인데, 다들 기꺼이 참여한다.
나는 21세기 문명의 주인공은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산업자본은 남성의 근육을 요구한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에서는 파워보다는 연결이 중요하다.
그래서 여성은 더 자연스럽게 적응한다.
남성들도 장점이 있다.
일단 마음을 먹으면 엄청난 추진력이 있다.
그래서 빨리 자기 철학을 하고 책을 낸다.
-- 정치인이나 사회지도층이 읽어야 할 고전이 있다면 무엇인가.
▲ 나는 정치인에 관심이 많지는 않다.
물론, 정치 현장에 뛰어들어 열심히 하는 분들을 존중한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진흙탕에서 애쓰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큰 스트레스이겠는가.
그런데 디지털시대에는 정치 영역이 많이 축소된다.
시스템 자체가 알아서 돌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시스템보다는 좀 더 근원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중국에서도 루쉰은 국민작가이긴 하지만 비정치적이다.
그는 정치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지적해서 국민작가가 됐다.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의 문제를 보는 것이 내 스타일에 맞는다.
-- 본인 삶은 성공적인가.
▲ 성공이라는 표현은 너무 빈약하다.
원하던 삶의 형식을 갖췄다는 점에서 나는 충만하다.
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나의 정신적 자산이 나를 자유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가야 할 길이다.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복을 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지혜롭고 유머가 넘치는 노년을 살다가 죽음을 맞으면 좋겠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