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nail) 하나가 없어서 편자(shoe)를 잃었고, 편자가 없다 보니 말도 잃게 됐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편자에 쓸 못 하나 때문에 왕국을 잃게 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취임 한 달 뒤 행한 연설에서 서구의 옛 속담을 패러디해 쓴 표현이다. ‘공급망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자리에서다. 이쯤 되면 못이 무엇을 뜻하는지 곧 연상될 것이다. 그렇다. 반도체(chip)다.

못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바이든은 상대가 그 못을 쓰지 못하도록 연신 ‘대못’을 박고 있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어 세액공제를 받은 기업이 중국에 투자하면 이를 몽땅 토하도록 한 데 이어, 이번엔 미국 기술이 들어간 반도체와 제조 장비까지 미국이든 미국 밖에서든 중국 반입을 일절 금지한 초강수 조치까지 꺼내 들었다.

이 수출 통제 조치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기업들은 중국 비즈니스와 관련해선 사실상 미국 국영기업이 될 전망이다. 통제 대상 기술 및 장비도 18㎚(나노미터) 이하 D램으로, 7나노 이하는 물론 1나노 선점 경쟁으로까지 진화한 반도체 파운드리 수준을 감안하면 중국의 반도체 기술을 석기시대급의 ‘레거시 테크(legacy tech)’로 묶어 두겠다고 단단히 벼르는 모양새다.

주목되는 것은 중국의 대응이다. 이번 바이든 정부의 조치는 과거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공급을 봉쇄한 트럼프 정부의 아이디어를 차용, 확대한 것이다. 당시 중국은 반도체 자립으로 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굳은 결의와 함께 그 계획을 ‘난니완 프로젝트’로 이름 짓기까지 했다. 난니완은 1930~1940년대 중국 공산당의 항일 게릴라 활동의 주요 무대였던 산시성(陝西省) 난니완(南泥灣)에서 따온 말이다.

기술은 독립운동 정신의 비장한 각오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반도체 중국몽’은 사실상 허언이 됐다. 어마어마한 부동산 잠재 부실 속에서 마오쩌둥·덩샤오핑급 지도자 자리를 꿰차려는 시진핑은 대만 침공이라는 ‘노출된 히든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미국 역시 대만의 긴장 고조가 싫지만은 않은 듯하다. 그렇게 갈구하는 TSMC를 아예 미국으로 옮겨 놓을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에서 세계를 움직이는 힘은 ‘반도체 지정학’이다. 반도체는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죽고 사는 문제가 됐다. 당초 370억달러로 시작된 미국의 반도체법 지원 규모는 백악관과 의회를 오가면서 520억달러로 불어났다. 유럽연합(EU)은 총 2조유로의 코로나 대책 예산 중 1500억유로를 반도체 육성 기금으로 슬그머니 전용했다. 플라자 합의 이상으로 미·일 반도체협정을 ‘억울하게’ 여기는 일본은 TSMC 구마모토 공장 건설을 계기로 반도체 강국 부활을 꿈꾸고 있다.

TSMC와 함께 반도체 지정학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다. 바이든이 일본에 앞서 한국부터 찾은 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간 곳이 삼성전자 평택 공장이다. 그런데 여의도를 보면 딴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다. 삼성전자 임원 출신인 양향자 의원이 대표 발의한 반도체 인력 확충과 세제 지원 등을 골자로 한 ‘K-칩스법’은 두 달 넘게 국회 산업위 소위에서 잠자고 있다. 그나마 세제를 다룰 기재위는 소위 구성조차 안 돼 있다. 세계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핑핑 돌아가는데, 포퓰리즘 법안과 저급한 정쟁거리만 넘쳐나는 게 한국의 국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걷어차는 우리에게 어떤 후과가 닥칠지 두려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