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누가 대한민국의 적(敵)인가
“핵보유국의 턱밑에서 살아야 하는 숙명적인 불안감…, 잔뜩 겁을 먹고 전전긍긍하는 몰골.”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이 지난 7월 27일 ‘전승절(휴전협정 체결)’ 69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을 향해 뱉어낸 조롱이다. 그리고 지난 10일, 북한군 전술핵운용부대 훈련현장에 나타나 또 다른 겁박을 쏟아냈다. “핵 전투 무력이 국가의 존엄과 자주권, 생존권을 지킨다. 적들과 대화할 내용도 없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의 말이 빈말이 아니고, 대한민국이 그가 말한 ‘적’임은 최근 북한군의 동태에서 분명해지고 있다. 올해 들어 탄도미사일을 23차례, 순항미사일을 두 차례 발사했는데 대부분이 대한민국 영토를 겨냥한 훈련이었다.

지난달 23일부터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아홉 차례나 실시한 미사일 공격훈련은 김정은이 직접 지휘했는데, 이를 ‘전술핵 부대 지휘’라고 불렀다. 핵무기를 미사일에 탑재해 대한민국 어느 곳에든 쏘아 올리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밝힌 것이다.

북한이 미국 등 서방의 견제를 뚫고 완전한 핵보유국이 됐음을 더는 부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9일자 서울 발(發) 기사에서 “북한은 핵 개발게임에서 이미 이겼다”며 “미국 정부는 북한 비핵화로 가는 창문이 닫혔음을 인정하고 현실적인 대응책을 내놔야 한다”고 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대목이 섬뜩하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겨냥한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는 영토 재설정(territorial revisionism) 등 온갖 도발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 나라가 적국의 핵그늘(nuclear shadow)에 갇힐 경우 어떤 수난을 당하는지를 요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잘 보여준다. 러시아 정부는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크림반도의 다리가 파괴되자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12개 도시에 84발의 미사일을 퍼부어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반격을 꾀하는 우크라이나를 향해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음을 거듭 위협하며 “이번 공격은 1탄에 불과하다”고 을러댔다.

북한의 핵 협박은 대한민국을 넘어 일본 등 동맹국들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지난 4일 미국령 괌을 사정권 안에 둔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일본열도를 넘겨 쏘아 올리는 심야훈련을 했다. 화들짝 놀란 일본이 긴급 경보 사이렌을 울리고 방공호 대피에 나서는 소동이 빚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사설에서 “쿠바가 미국 플로리다반도를 넘기는 미사일을 쐈다고 생각해보라”고 비유했을 정도의 당돌한 도발이었다.

‘비핵화’ 국제사회 요구에 순응해 핵 개발을 포기한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핵 공갈’에 결박돼 언제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는 처지임이 분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이 북한의 도발에 대응할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북한에 유화적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 시절 한·미·일 3국 국방장관이 만나 연합훈련 강화에 합의(2017년 10월 23일)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그런 문 전 대통령의 더불어민주당을 승계한 이재명 대표가 최근 동해상에서 한·미·일 합동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을 두고 ‘극단적인 친일 행위, 극단적인 친일 국방’이라고 비난해 논란을 빚고 있다. 퇴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전임자를 졸지에 ‘극단 친일’로 매도한 꼴이 돼서만이 아니다. ‘핵 깡패’가 마음껏 활개 치게 돕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주위국가들의 개별적 대응이다. 이런 작태를 막기 위해 힘을 합쳐 자위적 장치를 최대한 갖추려는 작업을 ‘친일’로 몰아붙이는 것은 어설픈 잘못이다.

몇 달 전까지 집권당이었던 거대야당의 최고지도자이자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인 이 대표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는 없어 보인다. 일각에서 그가 밀려들고 있는 사법 리스크를 피하기 위한 국면전환용 정치공세를 펴고 있다는 관측을 내놓는 이유일 것이다.

검찰 수사망이 좁혀지자 자신을 ‘탄압받는 대통령 정적’으로 규정했던 그가 ‘적’인 윤석열의 정부를 흔들어대기 위해 동원한 ‘아니면 말고’ 카드라는 분석도 있다. 어느 경우건 국정의 일각을 책임진 정치지도자로서 해선 안 될 일이다. 그에게 대한민국의 적은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