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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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사회에 유익","대기업노조 고용세습은 잘못돼"
노동 상담 외길 지켜…"자신과 가족만 위한 삶은 천박"
노동운동가 하종강(67)은 주말이면 더욱 바쁘다.
주중에 행사를 진행하지 못하는 소규모 노동조합들이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40년간 한결같이 노동 상담, 강연 등을 해왔다.
그는 인하대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성공회대 노동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에서 그는 노동조합이 사회에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군대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가족과 자신만을 위한 삶은 천박하다고 했다.
-- 어릴 때 가정 형편은 어떠했나.
▲ 아버지가 중고교 교사였다.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아버지는 평양에 살았는데 조만식 선생 아들과 함께 김일성 환영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김일성 치하에서 2년 정도 살다가 1·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북한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지주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결혼 당시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논밭이 있었는데. 수확하지 못한 채 토지개혁으로 몰수됐다고 한다.
남한에서 아버지는 모범 교사였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각각 훈장을 받았다.
내가 수배로 경찰에 쫓기던 시절 아버지가 받은 '전두환 시계'를 차고 다녔다.
-- 중고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 인천지역 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한다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인천중학교에 진학했고,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제물포고에 입학했다.
나는 고교 시절에는 학업에 집중하지 않았다.
같은 반 60명 가운데 59등을 해본 적이 있는데, 시험 전날 여학교 학생들과 관악산에 갔다 오는 바람에 시험공부를 하지 않은 결과였다.
나는 고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공부보다 책 읽는 게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갖게 됐다.
고3 때에는 시대적 상황까지 겹쳐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
--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을 했나.
▲ 학보사 기자로 일했다.
당시 학내에는 이념 서클이 많지 않았기에 학보사는 진보적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기독교 서클과 문예반 서클에 추가로 들어갔다.
그런데 학내 성명서를 쓰는 일이 문예반에 할당됐고. 선배들은 나에게 그 작업을 시키곤 했다.
성명서를 쓰려면 문건도 보면서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때 유신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사회과학 공부는 언제 했나.
▲ 70년대 학생운동은 유신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등의 순진한 수준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복학하고 나니 학생운동이 확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이 레닌 저작물을 읽기도 했다.
이념적 성향이 강해져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배웠다.
징역을 살고 나온 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독서량이 풍부했다.
나는 온건하고 소극적인 편이었다.
따라가는 편이었지 리드하는 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후배들이 나를 능력 있는 선배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대학 시절 고문당한 적이 있다던데.
▲ 사흘간 고문당했다.
물고문, 전기고문은 아니었다.
속칭 '통닭구이', '비녀꽂이'라는 일제 강점기때 방식의 고문이었다.
고문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자기의 비굴했던 모습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왜 좀 더 못 버텼을까.
왜 그렇게 비굴하게 애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모두 사라진 치욕적인 모습이다.
--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 노동해방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해 작은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내 생애에 불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공개적으로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아직은 사회주의 안에 많이 있다고 본다.
기존의 동부 유럽이나 소련, 북한, 중국 등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들을 뛰어넘는 사회주의가 가능하면 좋겠다.
-- 북한에는 노조가 있나.
▲ 북한에는 직총(조선직업총연맹)이 있다.
한국의 민주노총과 비슷한 조직이다.
--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에는 관심 없나.
▲ 관심이 특별히 있지는 않다.
그 분야는 잘 몰라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탈북자 등을 만나보면 화폐개혁, 3대 세습 이후 북한 사회주의가 많이 변질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북한 인권 문제를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남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노동조합이 우리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하나.
▲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에 유익하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은 살벌한 권리다.
노동자들이 파업해서 기업과 사회에 손실을 끼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본주의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을 이기적 이익을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비도덕적 운동처럼 취급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정서가 유독 심하다.
-- 한국 노동운동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의심 때문이 아닌가.
▲ 그것이 바로 레드콤플렉스(공산주의 공포증)다.
우리는 식민지 40년에 이어 분단상황 70년을 경험했고 그 와중에 군사정부 30년도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최소한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의식이 형성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노동 인권이 너무 취약해졌다.
-- 한국의 우경화가 심각하다고 했는데, 같은 이유인가.
▲ 우리 사회는 전반으로 너무 오른쪽에 치우쳐버렸다.
정치 성향이 중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다른 나라 시각에서는 극우에 해당한다.
미국 민주당이 노동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을 보면, 한국의 진보정당보다 수위가 높다.
-- 대기업의 고용세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고용 세습은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많은 회사가 그런 제도를 두고 있다.
노조와 합의 없이 친 회사 성향을 가진 사원의 자녀를 입사시키는 경우도 있다.
직원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는 이런 제도는 고졸 신입사원 채용에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 혜택을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군인 노조도 필요하다고 보나.
▲ 필요하다.
실제로 군인 노조가 다른 나라에는 많이 있다.
우리는 분단상황이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군인 노조가 만들어지면 군대가 훨씬 청렴해지고 내부 비리도 없어진다.
성희롱도 줄어들고 의문사도 많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군대가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게 된다.
독일의 경우 분단상황에서도 군인 노조가 있었다.
현재 북유럽의 모병제 국가들 대부분에는 군인 노조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인 노조가 생기면 부사관 이상의 직업군인들은 정규직, 징집된 군인들은 비정규직이 될 것이다.
--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심각한가.
▲ 현재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가량이다.
우리나라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큰 나라도 없다.
현대자동차에서 한 노동자가 분신했을 때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긴 상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똑같은 라인에서 왼쪽은 정규직이 조립하고, 오른쪽은 비정규직이 조립했는데, 업무 내용이 똑같고 사용하는 장비도 똑같았는데, 앞에 '비'자 하나 붙은 것 때문에 임금을 절반밖에 못 받았다.
".
--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이 양보해야 해결될 수 있는 거 아닌가.
▲ 그것은 옳은 처방이 아니다.
기업이 성과를 너무 많이 가져가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었다는 70년, 80년대에는 전체 경제와 가계소득 기업소득의 증가율이 각각 8%로 비슷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기업소득 증가율만 높아졌다.
아마 30%를 넘을 것이다.
정규직 임금도 계속 인상하고 비정규직은 더욱 빠르게 올려서 그 차이를 좁혀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급여를 합친 노동 소득 총량이 줄어들면 국가 경제에 해롭다.
-- 요즘 아침 기상 시간은 어떻게 되나.
▲ 아침에 일어나는 시각은 불규칙하다.
KTX가 개통된 이후 부산이나 광주의 오전 9시 강의도 가능해져서 1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새벽 5시 열차를 탄다.
보통 일어나서는 강의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 취미는 무엇인가.
▲ 취미가 없다.
당구, 바둑, 볼링, 스키 등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취미 활동보다 더 보람 있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항상 있었다.
가족들은 그게 바로 '워커홀릭' 증상이라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과 만나서 하는 일이 어떤 취미 활동보다 재미있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조급해하지 않고 길게 본다는 것이 나의 장점이다.
단점은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자녀들에게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삶은 천박하다고 말한다.
집에서 아이들이 햄스터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어미가 새끼를 눈물겹게 사랑하는 것을 봤다.
아이들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작은 짐승도 할 수 있다.
인간이 이런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뭔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그동안 삶에서 하이라이트는 언제였나.
▲1994년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다.
직원에게도,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준비해서 마감날 제출했는데,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꿈같이 당선됐다는 전화가 왔다.
당시에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내세울 것이 없는 내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웹툰과 JTBC 드라마 '송곳'의 모델이 된 것도 영광이다.
여러 명을 모아서 캐릭터를 만든 것인데. 나만 실제 모델인 것처럼 알려져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죄송하다.
▲ 존경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 농공단지 비닐하우스 같은 공장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존경한다.
이들에게 왜 노조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남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것 말고, 뭔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돌아가신 노회찬 의원한테는 애틋함이 있다.
행사가 열리면 나는 유명인처럼 절대로 무대 위에 앉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무대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하는데, 이때마다 노회찬 의원은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재촉하곤 했다.
-- 어떻게 40년간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나.
▲ 노동 상담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고전적 휴머니즘을 충족시키는 측면이 있어서 붙잡고 견디었다.
능동적으로 개척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견딜 수 있었던 것뿐이다.
경제적으로는 아내가 교사여서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나는 노동운동가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상담 활동가라는 표현이 맞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 한잔 떠다 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가 있다면.
▲ 별다른 것은 없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을 가능한 오랫동안 하고 싶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연합뉴스
노동 상담 외길 지켜…"자신과 가족만 위한 삶은 천박"
노동운동가 하종강(67)은 주말이면 더욱 바쁘다.
주중에 행사를 진행하지 못하는 소규모 노동조합들이 부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20대 청년 시절부터 40년간 한결같이 노동 상담, 강연 등을 해왔다.
그는 인하대 응용물리학과를 졸업하고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성공회대 노동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를 맡고 있다.
지난 12일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에서 그는 노동조합이 사회에 이익이 된다고 강조했다.
군대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가족과 자신만을 위한 삶은 천박하다고 했다.
![[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0/AKR20221014119500501_12_i_P4.jpg)
▲ 아버지가 중고교 교사였다.
연희전문학교 출신인 아버지는 평양에 살았는데 조만식 선생 아들과 함께 김일성 환영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김일성 치하에서 2년 정도 살다가 1·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오셨다.
북한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신 것이다.
지주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결혼 당시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논밭이 있었는데. 수확하지 못한 채 토지개혁으로 몰수됐다고 한다.
남한에서 아버지는 모범 교사였다.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각각 훈장을 받았다.
내가 수배로 경찰에 쫓기던 시절 아버지가 받은 '전두환 시계'를 차고 다녔다.
-- 중고교 시절은 어떻게 보냈나.
▲ 인천지역 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한다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인천중학교에 진학했고,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는 학생들이 들어가는 제물포고에 입학했다.
나는 고교 시절에는 학업에 집중하지 않았다.
같은 반 60명 가운데 59등을 해본 적이 있는데, 시험 전날 여학교 학생들과 관악산에 갔다 오는 바람에 시험공부를 하지 않은 결과였다.
나는 고교 시절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공부보다 책 읽는 게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갖게 됐다.
고3 때에는 시대적 상황까지 겹쳐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
-- 대학교 때 동아리 활동을 했나.
▲ 학보사 기자로 일했다.
당시 학내에는 이념 서클이 많지 않았기에 학보사는 진보적 역할을 담당했다.
나는 학보사 기자를 하면서 기독교 서클과 문예반 서클에 추가로 들어갔다.
그런데 학내 성명서를 쓰는 일이 문예반에 할당됐고. 선배들은 나에게 그 작업을 시키곤 했다.
성명서를 쓰려면 문건도 보면서 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때 유신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됐다.
-- 사회과학 공부는 언제 했나.
▲ 70년대 학생운동은 유신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등의 순진한 수준이었다.
80년대 초반에 복학하고 나니 학생운동이 확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이 레닌 저작물을 읽기도 했다.
이념적 성향이 강해져 있었다.
나는 후배들에게 배웠다.
징역을 살고 나온 후배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독서량이 풍부했다.
나는 온건하고 소극적인 편이었다.
따라가는 편이었지 리드하는 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후배들이 나를 능력 있는 선배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 대학 시절 고문당한 적이 있다던데.
▲ 사흘간 고문당했다.
물고문, 전기고문은 아니었다.
속칭 '통닭구이', '비녀꽂이'라는 일제 강점기때 방식의 고문이었다.
고문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자기의 비굴했던 모습이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왜 좀 더 못 버텼을까.
왜 그렇게 비굴하게 애원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이 모두 사라진 치욕적인 모습이다.
![[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0/AKR20221014119500501_07_i_P4.jpg)
▲ 노동해방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을 위해 작은 벽돌 한 장을 쌓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고 꿈꾸고 있는데, 그것이 내 생애에 불가능하더라도 그것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는가.
▲ 나는 공개적으로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자본주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아직은 사회주의 안에 많이 있다고 본다.
기존의 동부 유럽이나 소련, 북한, 중국 등은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다.
이들을 뛰어넘는 사회주의가 가능하면 좋겠다.
-- 북한에는 노조가 있나.
▲ 북한에는 직총(조선직업총연맹)이 있다.
한국의 민주노총과 비슷한 조직이다.
--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에는 관심 없나.
▲ 관심이 특별히 있지는 않다.
그 분야는 잘 몰라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탈북자 등을 만나보면 화폐개혁, 3대 세습 이후 북한 사회주의가 많이 변질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북한 인권 문제를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남겨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0/AKR20221014119500501_08_i_P4.jpg)
▲ 노동운동은 우리 사회에 유익하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 3권은 살벌한 권리다.
노동자들이 파업해서 기업과 사회에 손실을 끼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본주의 경제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을 이기적 이익을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비도덕적 운동처럼 취급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정서가 유독 심하다.
-- 한국 노동운동이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의심 때문이 아닌가.
▲ 그것이 바로 레드콤플렉스(공산주의 공포증)다.
우리는 식민지 40년에 이어 분단상황 70년을 경험했고 그 와중에 군사정부 30년도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를 최소한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사회의식이 형성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노동 인권이 너무 취약해졌다.
-- 한국의 우경화가 심각하다고 했는데, 같은 이유인가.
▲ 우리 사회는 전반으로 너무 오른쪽에 치우쳐버렸다.
정치 성향이 중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다른 나라 시각에서는 극우에 해당한다.
미국 민주당이 노동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을 보면, 한국의 진보정당보다 수위가 높다.
![[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0/AKR20221014119500501_09_i_P4.jpg)
▲ 고용 세습은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많은 회사가 그런 제도를 두고 있다.
노조와 합의 없이 친 회사 성향을 가진 사원의 자녀를 입사시키는 경우도 있다.
직원 자녀에게 가산점을 주는 이런 제도는 고졸 신입사원 채용에만 해당하는 것이어서 그 혜택을 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요즘에는 대부분의 자녀가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 군인 노조도 필요하다고 보나.
▲ 필요하다.
실제로 군인 노조가 다른 나라에는 많이 있다.
우리는 분단상황이어서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의하지 않는다.
군인 노조가 만들어지면 군대가 훨씬 청렴해지고 내부 비리도 없어진다.
성희롱도 줄어들고 의문사도 많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군대가 본연의 의무에 충실하게 된다.
독일의 경우 분단상황에서도 군인 노조가 있었다.
현재 북유럽의 모병제 국가들 대부분에는 군인 노조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인 노조가 생기면 부사관 이상의 직업군인들은 정규직, 징집된 군인들은 비정규직이 될 것이다.
--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심각한가.
▲ 현재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가량이다.
우리나라처럼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큰 나라도 없다.
현대자동차에서 한 노동자가 분신했을 때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긴 상태에서 이런 말을 했다.
"똑같은 라인에서 왼쪽은 정규직이 조립하고, 오른쪽은 비정규직이 조립했는데, 업무 내용이 똑같고 사용하는 장비도 똑같았는데, 앞에 '비'자 하나 붙은 것 때문에 임금을 절반밖에 못 받았다.
".
--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이 양보해야 해결될 수 있는 거 아닌가.
▲ 그것은 옳은 처방이 아니다.
기업이 성과를 너무 많이 가져가서 생기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이었다는 70년, 80년대에는 전체 경제와 가계소득 기업소득의 증가율이 각각 8%로 비슷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기업소득 증가율만 높아졌다.
아마 30%를 넘을 것이다.
정규직 임금도 계속 인상하고 비정규직은 더욱 빠르게 올려서 그 차이를 좁혀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급여를 합친 노동 소득 총량이 줄어들면 국가 경제에 해롭다.
![[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0/AKR20221014119500501_10_i_P4.jpg)
▲ 아침에 일어나는 시각은 불규칙하다.
KTX가 개통된 이후 부산이나 광주의 오전 9시 강의도 가능해져서 1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새벽 5시 열차를 탄다.
보통 일어나서는 강의 준비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 취미는 무엇인가.
▲ 취미가 없다.
당구, 바둑, 볼링, 스키 등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취미 활동보다 더 보람 있다고 느껴지는 일들이 항상 있었다.
가족들은 그게 바로 '워커홀릭' 증상이라고 한다.
지금도 사람들과 만나서 하는 일이 어떤 취미 활동보다 재미있다.
-- 본인의 장단점은 무엇인가.
▲ 조급해하지 않고 길게 본다는 것이 나의 장점이다.
단점은 우유부단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 삶의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 자녀들에게 자기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삶은 천박하다고 말한다.
집에서 아이들이 햄스터를 키운 적이 있었는데, 어미가 새끼를 눈물겹게 사랑하는 것을 봤다.
아이들에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이렇게 작은 짐승도 할 수 있다.
인간이 이런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뭔가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 그동안 삶에서 하이라이트는 언제였나.
▲1994년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을 때였다.
직원에게도,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고 몰래 준비해서 마감날 제출했는데,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꿈같이 당선됐다는 전화가 왔다.
당시에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내세울 것이 없는 내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웹툰과 JTBC 드라마 '송곳'의 모델이 된 것도 영광이다.
여러 명을 모아서 캐릭터를 만든 것인데. 나만 실제 모델인 것처럼 알려져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죄송하다.
![[삶] 40년 노동운동가 하종강 "군대에도 노조 필요하다"](https://img.hankyung.com/photo/202210/AKR20221014119500501_11_i_P4.jpg)
-- 농공단지 비닐하우스 같은 공장에서 만나는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존경한다.
이들에게 왜 노조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남 앞에서 잘난 척하는 것 말고, 뭔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돌아가신 노회찬 의원한테는 애틋함이 있다.
행사가 열리면 나는 유명인처럼 절대로 무대 위에 앉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무대 아래에서 사진을 찍곤 하는데, 이때마다 노회찬 의원은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재촉하곤 했다.
-- 어떻게 40년간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나.
▲ 노동 상담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고전적 휴머니즘을 충족시키는 측면이 있어서 붙잡고 견디었다.
능동적으로 개척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더니 견딜 수 있었던 것뿐이다.
경제적으로는 아내가 교사여서 가능한 측면이 있었다.
나는 노동운동가라기보다는 노동운동 상담 활동가라는 표현이 맞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물 한잔 떠다 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 앞으로의 계획과 포부가 있다면.
▲ 별다른 것은 없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을 가능한 오랫동안 하고 싶다.
(취재지원: 정한솔 인턴기자)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