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산업은 1951년 반독점 규제로 미국 AT&T 자회사 웨스턴일렉트릭이 특허를 개방하면서 시작됐다. 일본은 1980년대 세계 메모리반도체 10대 기업에 6개를 포진시키며 30년 만에 세계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그 영향으로 1985년 인텔이 D램 사업을 포기하고, 1986년에는 RCA가 문을 닫았다. 미국으로선 ‘제2의 진주만 습격’이었다.

미국은 보복 관세와 함께 1986년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 비중을 20%까지 끌어올리는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이번엔 페리 제독의 일본 강제 개항에 비유되는 ‘제2의 굴욕 개항’이 됐다. 이후 2, 3차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기업들이 초토화되면서 2012년 NEC·히타치 합작의 일본 유일의 D램 회사 엘피다 마저 파산하기에 이른다.

작년 10월 14일, ‘잃어버린 30년’ 동안 반도체 왕좌도 상실한 일본은 세계 최대 파운드리 기업 대만 TSMC 공장 유치로 반도체 왕국 부활을 향한 전기를 마련했다. 통상 관방장관이 하는 발표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직접 했다. 발표 날짜로 택일한 날은 중의원 해산과 함께 중간선거전에 돌입하는 날이다. 경제를 정치에 활용하는 점에선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2024년 완공되는 TSMC 공장은 소니의 요청으로 구마모토에 있는 소니의 세계 최대 이미지센서 반도체 칩 공장 바로 옆에 들어선다. 도요타자동차에 화상 안전장치 센서 등을 공급하는 세계 2위 자동차 부품 기업 덴소도 참여한다. TSMC 구마모토 공장은 일본 자율주행차 기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보여지며, 일본은 TSMC와의 제휴 확대를 위해 도쿄대-TSMC 공동 연구 개발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TSMC 공장 건립에는 일본 정부가 경제안보법 기금을 활용해 총투자 규모의 절반 정도인 4760억엔(약 4조6160억원)을 지원한다. 인근 구마모토대는 반도체학과를 신설하고, TSMC가 요구하는 기술들로 커리큘럼을 짜기로 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대중(對中) 반도체 기술 및 장비 수출 통제로 고민에 빠져 있는 사이, 일본과 대만의 협공 분위기를 우리 정치권이 느끼고 있는지 의문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