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시선] 멈춰서는 안 되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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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서 '자유' 삭제 시도한
文 정부 인사들 잊어선 안돼
'자유' 가치 강조한 尹대통령
불순한 개헌 나선 배경 캐묻는
'정치적 질문'으로 바꾸길
이응준 시인·소설가
文 정부 인사들 잊어선 안돼
'자유' 가치 강조한 尹대통령
불순한 개헌 나선 배경 캐묻는
'정치적 질문'으로 바꾸길
이응준 시인·소설가
개신교 목사 리처드 범브란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의 영향하에 공산화된 루마니아의 정치범 감옥에 14년간 갇혀 있다가 1965년 미국으로 탈출했다. 그는 자신의 책 <하나님의 지하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증언을 한다. ‘루마니아에 진주한 소련 군인들에게 전도하는 일은 뜻밖에 쉬웠다. 그들 대부분은 징집되기 전 러시아의 농부들이었다. 누군가 자연을 다스리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공산주의국가에서 무신론자이게끔 교육받았기에 자신들이 무신론자인 줄 믿고 있었을 뿐이다.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서 자기들이 기독교 신자인 줄 믿고 있듯이.’
몸 하나에 머리가 두 개 달린 공명조(共命鳥)는 불경(佛經)에 나오는 새다. 어느 날 머리 하나가 앙심을 품고는 다른 머리에게 독(毒)이 든 열매를 먹이자, 온몸에 독이 퍼져 둘 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지난 정권에서 ‘개헌파동’이 있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보다 넓은 의미의 ‘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하기로 했고요.”라고 여당 여성 원내대변인이 또박또박 말하는 걸 TV에서 봤다. 헌법 4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에서 ‘자유’를 지우겠다는 소리였다. 반대 여론이 들끓자, 여당 의원들은 긴급히 회의를 열었고, 자기들끼리 투표한 결과 적극적 찬성이 40%에 그쳤다며 그 개헌안 관철을 유보했다. 별개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변경됐다.
무엇보다 당시 나는 정의당이 왜 저런 개헌안에 반대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4조에 대하여 “유일정당 체제로 통일이 돼선 안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 것은, 자유민주주의헌법 아래서만 정의당과 같은 사회민주당, 특히 여타 소수 정당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나아가 집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최대한 넓게 실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이고 다름 아닌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니, “보다 넓은 의미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해서 ‘자유’를 빼려고 한다는 주장은 무식하거나 음흉한 난센스다.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민주주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끔찍한 거짓말’일 뿐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 헌법은 공명조가 공멸조(共滅鳥)로 전락하는 일이며 개헌이 아니라 국체(國體)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이다. 게다가 당내 찬성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그토록 어마어마한 짓을 애초에 투표도 없이 추진했다니 민주적 기본질서가 전혀 없는 반민주 정당이요, 그 지도부는 여러 심각한 의심들을 실컷 받아도 싸다. 그 40% 국회의원들이 설마 반역자가 아니라 차라리 ‘위험한 바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는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기에 그것이 사라져 질식하기 전까진 소중함을 모른다. 또한 일반 대중에게는 어쩌면 신학(神學)만큼이나 어려운 개념이며 그렇다고 해서 ‘민족’처럼 마약적(痲藥的)이지도 않다. 깨닫기는 힘든데 깨달아도 뭔가 심심하고 실천하기는 더 피곤한 게 ‘자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가치를 슬로건으로 삼은 대통령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 재미없는 ‘자유’를 강의하듯 자꾸 연설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답답한 일이다. 대신 그것을, “왜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하려고 했냐? 또 그럴 거냐?”는 질문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멈춰서는 안 되는 질문이 바로 ‘정치’다. 정치는 타협이 아니라 ‘재배치(replacement)’다.
진보와 좌익이 동의어가 아니듯 보수와 우익이 당연한 한 쌍은 아니며, 한 사람의 정치적 견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자기가 무신론자인 줄 아는 러시아 병사가 신앙심을 가지고 있듯 우리는 좌파든 우파든 사실은 대부분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저 국회의원들은 신앙 없는 기독교인 같은 가짜 민주주의자들이다.
‘새는 왼쪽과 오른쪽 날개로 난다’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비유가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느 한쪽 날개가 아니라 몸통이기 때문이다. 그 새가 진보와 보수의 양 날개를 유연히 휘저으며 개인의 삶과 역사의 창공을 날아갈 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몸 하나에 머리가 두 개 달린 공명조(共命鳥)는 불경(佛經)에 나오는 새다. 어느 날 머리 하나가 앙심을 품고는 다른 머리에게 독(毒)이 든 열매를 먹이자, 온몸에 독이 퍼져 둘 다 죽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지난 정권에서 ‘개헌파동’이 있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보다 넓은 의미의 ‘민주적 기본질서’로 수정하기로 했고요.”라고 여당 여성 원내대변인이 또박또박 말하는 걸 TV에서 봤다. 헌법 4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에서 ‘자유’를 지우겠다는 소리였다. 반대 여론이 들끓자, 여당 의원들은 긴급히 회의를 열었고, 자기들끼리 투표한 결과 적극적 찬성이 40%에 그쳤다며 그 개헌안 관철을 유보했다. 별개로,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 시안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변경됐다.
무엇보다 당시 나는 정의당이 왜 저런 개헌안에 반대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헌법재판소가 헌법4조에 대하여 “유일정당 체제로 통일이 돼선 안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 것은, 자유민주주의헌법 아래서만 정의당과 같은 사회민주당, 특히 여타 소수 정당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나아가 집권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최대한 넓게 실현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헌법이고 다름 아닌 현행 대한민국 헌법이니, “보다 넓은 의미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해서 ‘자유’를 빼려고 한다는 주장은 무식하거나 음흉한 난센스다.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민주주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끔찍한 거짓말’일 뿐이다. ‘자유’ 없는 민주주의 헌법은 공명조가 공멸조(共滅鳥)로 전락하는 일이며 개헌이 아니라 국체(國體)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이다. 게다가 당내 찬성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데 그토록 어마어마한 짓을 애초에 투표도 없이 추진했다니 민주적 기본질서가 전혀 없는 반민주 정당이요, 그 지도부는 여러 심각한 의심들을 실컷 받아도 싸다. 그 40% 국회의원들이 설마 반역자가 아니라 차라리 ‘위험한 바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는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기에 그것이 사라져 질식하기 전까진 소중함을 모른다. 또한 일반 대중에게는 어쩌면 신학(神學)만큼이나 어려운 개념이며 그렇다고 해서 ‘민족’처럼 마약적(痲藥的)이지도 않다. 깨닫기는 힘든데 깨달아도 뭔가 심심하고 실천하기는 더 피곤한 게 ‘자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가치를 슬로건으로 삼은 대통령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대통령이 이 재미없는 ‘자유’를 강의하듯 자꾸 연설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답답한 일이다. 대신 그것을, “왜 헌법에서 ‘자유’를 삭제하려고 했냐? 또 그럴 거냐?”는 질문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멈춰서는 안 되는 질문이 바로 ‘정치’다. 정치는 타협이 아니라 ‘재배치(replacement)’다.
진보와 좌익이 동의어가 아니듯 보수와 우익이 당연한 한 쌍은 아니며, 한 사람의 정치적 견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다. 자기가 무신론자인 줄 아는 러시아 병사가 신앙심을 가지고 있듯 우리는 좌파든 우파든 사실은 대부분 자유민주주의자들이다. 그리고 저 국회의원들은 신앙 없는 기독교인 같은 가짜 민주주의자들이다.
‘새는 왼쪽과 오른쪽 날개로 난다’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비유가 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는 어느 한쪽 날개가 아니라 몸통이기 때문이다. 그 새가 진보와 보수의 양 날개를 유연히 휘저으며 개인의 삶과 역사의 창공을 날아갈 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