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준병의 정책프리즘] '죽음의 계곡' 건널 과감한 정부 투자 필요하다
정부가 과학기술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무 중심 R&D 혁신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반가운 소식이다. 최근 유행처럼 언급되는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은 사실 꽤 오래된 정책 수단이다. 2차 세계대전 도중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 발사, 미국 국방부의 국방고등연구사업청(DARPA) 프로그램은 모두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의 사례다.

이들 정책은 초기 국방, 우주 탐사 등의 분야에서 기술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과학기술 프로그램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후변화, 고령화, 신재생에너지 등 거대 사회문제 해결에 중점을 두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DARPA 역시 80% 이상이 응용·개발 프로젝트이며 그 결과물을 민간 기업에서 활용해 생산하는 스핀오프(spin-off)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인터넷도, GPS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은 분명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좋은 정책적 수단이지만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세심한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과거 산업 정책과는 확연히 구분돼야 한다. ‘임무’의 설정은 정부와 전문가가 하향식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와의 숙의 과정이 필요하다. 대화와 협의가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과학기술정책은 자칫 무늬만 임무 지향적일 뿐 과거의 정부 주도 산업 정책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다.

성공적인 임무 지향적 기술 정책을 위해서는 연구개발 결과물에 대한 ‘정부의 시장 선도와 수요 창출 능력’도 중요하다. 정부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시장 실패를 교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연계·조정하고, 새로운 연구 주체와 기술, 산업을 연결하는 동태적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에서 정부는 능동적으로 연구개발의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수하며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기반을 형성하는 주체다. 새로운 기술적 기반과 시장을 형성하는 선도적인 혁신 투자를 수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민간 부문의 참여와 후속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여기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정부의 과학적인 공공 조달정책이다.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은 그 특성상 성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거나 아예 시장이 형성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정부는 공공 조달정책을 통해 기업이 연구개발과 생산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지나게 되는 소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버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정부 공공 조달정책의 과학화는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에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DARPA가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과제를 오랫동안 지속해서 추진할 수 있는 이유도 시장 수요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충분한 예산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국방부의 정부 구매 제도 때문이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매우 큰 산업 구조적 변곡점에 와 있다. 과거 정부 주도의 산업 정책과 경제 성장 방식은 한계에 이르렀지만, 미래 성장동력을 중심으로 추격국가(fast follower)에서 선도국가(first mover)로 도약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여전히 바이오, 항공우주, 신재생에너지 등 미래 주요 산업 분야에서는 선진국과 상당한 기술 격차가 존재한다. 임무 지향적 기술혁신정책의 도입은 과거 정부 주도 산업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점에서 기대가 된다. 윤석열 정부의 글로벌 과학기술 5대 강국을 실현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함께 성과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