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살고 있는 80대 노인 안소니는 런던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평소 집에선 헤드셋을 쓰고 오페라 음악을 즐겨듣기도 하죠. 그런데 평소 자신을 자주 찾아오던 딸 앤이 갑자기 런던을 떠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안소니는 모든 기억의 조각들이 흩어지고 뒤섞이는 걸 느낍니다. '앤이 내 딸이 맞긴 한 걸까. 나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누구일까. 남자의 말대로 그가 딸의 남편가 맞긴 한걸까.'
기억을 잃어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그 망각과 상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깨닫게 된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울까요.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영화 '더 파더'(2021)는 치매 환자 안소니를 통해 기억의 상실, 그리고 이로 인한 커다란 고통을 그립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명배우들이 출연해 더욱 화제가 됐죠. 안소니 홉킨스가 안소니 역을, 올리비아 콜먼은 앤 역을 맡았습니다. 안소니가 즐겨듣는 오페라 음악들은 관객들의 감정 이입을 돕고, 영화를 더욱 빛나게 해줍니다. 영화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오페라 아리아는 프랑스 출신의 음악가 조르주 비제(1838~1875)의 작품입니다.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중 많은 사랑을 받은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입니다. 안소니가 헤드셋으로 음악을 듣는 장면, 딸이 요양 병원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거는 장면, 딸이 아버지를 두고 떠나는 장면에서 흐르는데요. 절절한 선율에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비제는 '진주조개잡이' 뿐 아니라 오페라 '카르멘', '아를의 여인 모음곡' 등으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대표적인 '비운의 천재'로 꼽힙니다. 어린 시절부터 특출난 재능을 보여 그의 인생엔 꽃길만 펼쳐질 것 같았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심지어 37살 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인지 비제의 음악들은 더욱 슬프고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비제는 어린 시절부터 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실력이 워낙 뛰어나, 9살이 되던 해 음악 천재들이 모이는 파리 음악원에 최연소로 입학했습니다. 원래 이보다 더 어린 나이에 입학 신청을 했지만, 너무 어려 연기된 것이었습니다. 음악원에 들어가서도 수석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17살이 되던 해엔 처음으로 교향곡을 작곡했는데요. 음악원 재학 중 교향곡을 쓴 학생 가운데 두 번째로 어린 나이였다고 합니다. 이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아 4년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갈 수 있는 '로마대상'에서도 우승을 차지해 로마로 떠나게 됐죠.
로마에서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접한 비제에겐 이제 성공할 일만 남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첫 작품이었던 종교 음악 '테 데움'이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다시 귀국하게 됐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는 파리 귀국 후 1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했죠. 그가 25살이 되던 해 초연된 '진주조개잡이'는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영화 속 안소니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깊은 절망과 비극을 다뤘다는 점은 비슷하죠.
진주조개잡이는 나디르와 주르가 라는 두 남자가 여사제 레일라를 동시에 사랑하며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우정을 위해 각자 마음을 포기하기로 하고, 나디르는 방랑길에 오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나디르는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나디르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고 레일라의 음성임을 알아챕니다. 이때 나오는 아리아가 '귀에 익은 음성'입니다. "그 노랫 소리 아직도 귀에 맴도네/소나무 아래 숨어서 듣던 그 소리/비둘기의 노래처럼 부드럽고 낭랑한 그녀의 음성/오! 마법에 홀린 밤, 신성한 희열/오! 매혹적인 추억, 미칠듯한 도취, 달콤한 꿈" 이 아리아는 19세기 프랑스 아리아 중 가장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나디르와 레일라가 사랑에 빠지자, 주르가는 두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하지만 주르가는 과거 자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소녀가 레일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둘의 사랑을 지켜주기로 합니다. 그런데 여사제의 사랑이 금지된 상황에서 이 커플은 위험에 처합니다. 결국 주르가는 마을에 불을 지른 다음 어수선한 상황에서 두 사람을 도망시키고, 자신이 대신 처형당합니다.
내용이 흥미롭고 아리아도 아름답지만, 이 작품 역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평론가들은 "베르디와 구노의 스타일을 답습한 작품"이라고 혹평했고, 대중들도 큰 관심을 갖지 않았죠.
그러다 분위기가 반전될 것 같은 기미가 보였습니다. 연극 '아를의 여인'에 들어간 음악들로 구성된 '아를의 여인 모음곡'이 좋은 반응을 받은거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다시 비제는 좌절하게 됐습니다. 이를 오페라로 다시 만들려 했지만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파리국립오페라극장에 갑자기 불이 나며 올리지 못했죠.
오늘날 비제의 대표작이자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오페라 '카르멘' 역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카르멘'은 집시 여인 카르멘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카르멘은 군인 돈 호세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투우사 에스카밀로에게 이끌리게 됩니다. 그러자 돈 호세가 질투심에 휩싸여 카르멘을 죽이는 비극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계속된 실패에 시달렸던 비제는 '카르멘'만은 꼭 성공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밤새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작품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비제는 크게 상심했습니다. 관객들은 집시 여인이 주인공인 작품이라는 점에 크게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카르멘'은 비제의 유작이 됐습니다. 초연 실패 후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밤샘 작업으로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수영을 했다가 무리가 온 것이죠.
비제가 세상을 떠난 후 '카르멘'은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았습니다. 유럽, 미국 등에서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습니다. 작품에 나오는 '하바네라'를 비롯해 '투우사의 노래' '꽃노래' 등도 큰 인기를 얻었죠.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계속된 불운에 시달렸던 비제의 삶이 처연하게 느껴지는데요. 하지만 그는 생계를 위협받는 순간에도 끝까지 자신의 음악 세계를 지키려 노력했습니다.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따라 하고 있었지만, 비제는 자신만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방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모방의 대상이 되는 작품이 위대할수록 그 모방은 우스운 것이 된다."
어떤 순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특히 잘 될 줄 알았던 일들이 반복적으로 실패할 땐 더욱 그렇죠. 그래서 보다 편하고 쉬운 길을 찾고 싶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비제처럼 끝까지 소신과 당당함을 지켜나간다면, 언젠가 그 노력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요.
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